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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Oct 23. 2023

십 년 직장생활을 해도 돈을 모으지 못한 이유

이런 형편에 어떻게 아일랜드에 갈 생각을 했을까?

자본주의에서 꼭 필요한 것이자 내 인생의 밸런스를 가장 크게 깨트리는 건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이십 대에 등한시했던 자본력과 경제관념이 아일랜드를 다녀와서야 생겼다. 오늘은 내가 십 년 직장생활을 해도 돈을 모으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이런 형편에 아일랜드 1년 살이는 어떻게 갈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가난은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자랑도 아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가정환경과 대학 입학의 역학관계.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말자.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지금은 병원에 계시는 아버지가 젊었을 땐, 친할머니의 보살핌으로 번듯한 직장생활이 가능했다. 친할머니는 나와 아버지가 염려되었는지 아버지 월급을 아끼고 아껴 매달 꼬박꼬박 정기적금을 들었고 꽤 목돈을 모았지만 그 즈음. 아버지 병세가 악화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했고 노쇠한 할머니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할머니는 살뜰히 모은 돈 중 절반을 선뜻 내어주며 대학 등록금으로 쓰라고 했다. 나는 대구의 한 가톨릭 대학에서 전년 장학금을 제안받았지만, 여러 이유로 경기권에 있는 사립 대학에 입학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대학이 전국에서 등록금 비싸기로 유명했다.

 

그래도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당시 십 대들의 우상이던 H.O.T 토니 오빠를 만나겠다던 꿈도 져버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무남독녀로 외로웠던 내게 친 자매와도 같던 사촌들의 수원으로 이사도 한 몫했으며 재가하신 엄마와 동생들이 서울 근교에 살고 있었으니 여러모로 뒤늦게 합격한 사립 대학에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막연한 서울에 대한 동경이었으며, 현실 도피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당시 친척들은 우리 집 형편에 무슨 대학이냐 그것도 국립도 아닌 사립 대학이 웬 말이냐 혀를 끌끌 찼다. 연세 많은 할머니와 알코올 중독으로 점차 인지판단이 흐려지는 아버지를 두고 나만 잘 살겠다고 집을 떠난다느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특히 둘째 큰엄마는 온갖 비판과 힐난으로 나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 후 큰엄마는 당시를 떠올리며 미안했다고 전화를 주셨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친가와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왠지 아버지를 짐처럼 여기며 연락이 올까봐 두려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른 뒤 보란듯이 보여주고 싶다.

당신들이 기피하는 우리 아버지는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한편으론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감이 들 때면, 그들의 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하루가 멀다고 술에 절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버지도. 그런 아버지를 눈물 바람으로 지켜보며 가슴 멍들이며 살던 할머니도. 임대주택에 산다고 불우하게 바라보던 사회의 시선도 모두 진저리 났다. 집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이혼을 선택한 부모님, 그리고 부유한 집안을 선택하여 태어날 순 없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나의 숙명이었다 해도 남은 여생은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순 없으므로...


인생은 계획 대로 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피, 땀, 노력에 깃든 '사랑'


외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아이고, 세상이 그리 니 맘대로 될 듯싶나?" 라고. 외할머니 말마따나 사 년간 대학 등록금과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의 주인공 최우식처럼 나도 계획은 다 있었다. 대학에 가면 파트타임도 하고 장학금을 받아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장학금은커녕 파트타임 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노는 것도 공부도 어중간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현실직시를 하지 못한 그저 어리석은 나였다.

 

결국 두 학기를 다니고 일 년 휴학을 했다. 휴학기간 동안에도 제과점과 패스트푸드점 파트타임을 하며 고작 몇 백만 원을 모았다. 복학 후에는 병세가 좋아지신 아버지가 막노동으로 매월 오십만 원씩 보내주기도 했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과 몸을 이끌고 일을 한 돈을 내게 보내주신 아빠만 생각하면 늘 마음 한켠이 쓰리고 눈물이 날 것 같다. 아버지는 날 많이 힘들게 한 사람이지만 (아버지 딴에는 정말 최선을 다했을) 내게 준 사랑만큼은 내가 아버지에게 다시 돌려드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안다. 




대학 졸업과 취업 후 아일랜드에 가기 전 퇴사하기까지 꼬박 십 년 육 개월을 쉼 없이 직장 생활을 했다.

십 년 직장생활을 하고도 돈을 모으지 못했던 이유.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묻고 상의하기보다는 혼자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에 익숙한 나는 독립심이 강하다. 반면 현명한 선택을 위한 판단력은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혀 철저히 깨부숴지며 깨달아야 했다.


대학 1년 휴학 후 학교에 복학한 후에는 나도 정신을 차렸다. 어중간하게 살다가는 학교 졸업도 못할성 싶었다. 평일에는 당구장 파트타임으로 생활비를 벌었고, 주말에도 늘 도서관에서 공부를 게으리하지 않아 이후 졸업까지는 성적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학금과 아버지가 부쳐주는 돈으로는 기숙사 비용과 생활비로 역부족이었다.


결국 나는 이율이 낮은 학자금 대출받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신용카드의 단기 대출 서비스를 자주 이용했다. 당신 학생에게도 규제 없이 발급해주던 신용카드의 단기 대출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다 보니 어느덧 학생 신분으로 빚이 삼백 만원이 넘어갔다.


삶은 가족, 건강, 일, 사랑, 경제력 모든 면에서 밸런스가 유지되어야 한다. 살면서 나름대로 일적인 커리어나 인간관계는 꾸준히 잘 쌓아온 것 같은데 내 삶의 밸런스를 가장 크게 깨트리는 것이 있다면. 내가 인생에서 잘못 살아온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경제관념 없이 늘 밑바닥이었던 재정상태였다.


지금까지도 가장 후회되는 것은 내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는 점과 빚지는 것에 너무 관대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세상에 좀 더 똑똑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남들은 십 년간 직장 생활을 했으면, 버젓이 모아둔 돈이 꽤 될 거라 말하지만 내 통장잔고는 늘 마이너스에 허덕여야 했다. 취업 후 우선 신용카드 대출을 갚아야 했으며, 아버지가 기초생활수급자였는데 내가 취업을 하면서 바로 그 자격을 박탈당했다. 지금은 부양가족 의무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고 있지만, 불과 15년 전만 해도 한국의 복지정책은 굉장히 미비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 취업한 후에는 조금씩 안정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즈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후 아버지는 병원 신세를 계속 져야 했는데 매월 병원비를 내가 책임져야 했다. 물가가 비싼 서울에서 자취하며 아버지 병원비와 내 생활비를 빼고 매달 대출금을 갚고 나면 적금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 때 한 번쯤 가본다던 유럽 배낭여행이나 어학연수는 꿈도 꾸지 못했고, 해외여행이라곤 직장 생활 사 년 차에 여름휴가로 필리핀 세부에 다녀온 게 전부다.


이런 형편에 어떻게 아일랜드에 갈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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