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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Jul 03. 2020

나의 친구 다이애나

싸이월드 시절 소환

널 다이애나라고 불러도 될까? 감히 나 따위가 앤을 자처하고 널 다이애나로 밀어버리다니...!


싸이월드가 폐쇄되었다. 친구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다급해져서 로그인 페이지로 들어갔는데 되지 않았다. 혼란과 좌절의 며칠을 보내는데 남편이 로그인 없이 백업받는 프로그램을 찾아 주었고, 가까스로 사진을 다운로드받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예뻤던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술렁였지만, 실체를 마주하고 보니 “막, 그렇게 이쁘지는 않더라?” 하고 김이 빠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겉도 속도 그렇게 많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 기록이 없다면 나의 나이 듦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워 길을 잃은 기분일 것 같다. 10여 년의 기록, 20대의 거의 모든 것이 미니홈피에 남아 있어서 어떻게든 복원하고 싶었다. 길호넷님의 박애주의로 이미지 기록은 어느 정도 회복했고, 나의 간증에 주위의 아우성이 빗발쳤기 때문에 여러 번의 시도 끝에 [cyworld.com/미니홈피주소]로 접속이 가능하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물론 공개된 게시물만 볼 수 있어서 비밀의 문 안에 갇혀 버린 기록물은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싸이월드는 나의 대학 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기숙사 방 컴퓨터 앞에서 아이디를 만들고 생전 처음 홈페이지(미니이긴 하지만)라는 곳에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했다. 종이 일기장을 여전히 사용하긴 했지만, 이미지와 영상을 보관할 수 있고, 일기뿐만 아닌 다양한 주제를 카테고라이징 하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나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대학생이 되었던 스물한 살부터 안정되지 않던, 방황하던 20대의 전체는 그렇게 미니홈피에 담겼다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 같은 기숙사 방을 쓰는 친구들은 다 도착한 것 같았는데, 방은 비어 있었다. 주근깨를 지우는 레이저 시술을 너무 늦게 선택한 때문에 얼굴은 아직 딱지로 덕지덕지 덮여 있었고 그걸 가려 보려는 요량으로 덮어쓴 야구 모자는 전혀 효과가 없는 듯했다. 후회 때문에 좀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주근깨는 앤 이라는 별명을 만들어 준 결정적 요인이었지만, 주근깨가 생기던 그날, 교회에서 실외 수영장엘 갔고, 엄마는 나를 혼자 보냈고, 선크림도 선캡 도 없이 혼자서 땡볕이 내리쬐는 물속에서 장장 대여섯 시간을 정신없이 놀았던 그 날을 내내 후회했다. 피부가 다 벗겨지는 고통은 아홉 살의 아이가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주었는데, 얼굴에 다닥다닥 내려앉은 주근깨는 평생을 사라지지 않고 흔적을 남겼다. 남겨진 자리에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빨간 츄리닝 하의를 입고 다람쥐꼬리 같은 포니테일을 한 다이애나가 활기차게 다가와 사투리로 물었다.

니는 어디서 왔는데?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보통 표준어를 구사했지만, 그 애가 사투리로 물어왔기에 나도 사투리로 대답했다.

“경상도 **이다.”

“맞나. 나는 **. 여기 아들은 다 서울말 쓴다. 즈그들끼리 명찰 내밀고 인사하고 난리다.”

그렇게 사투리를 쓰는 소외자들(학교에는 전국 팔도의 사투리인들이 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재외국민까지 포함하여 실로 다양한 억양과 발음의 구성원이 존재했는데, 재외국민의 꼬부랑한 발음처럼 자랑스럽지도(?) 않고, 여타 다른 지역의 사투리처럼 쉽게 감춰지지도 않는 경상도의 사투리는 타인들에겐 그냥 신기하고 재미있는 말투 정도였을지 모르지만, 사용자에게는 치부 같은 것이 되곤 했다.)의 공감대로 다이애나와 나는 가볍게 서로의 경계를 넘었다. 전화번호를 받고 내 번호를 찍어주는 대신 전화를 걸었는데, 이승환의 <고함>이 흘러나왔다. 내가 반색하자 다이애나의 표정도 환하게 피어났다. 이승환 중에서도 다른 발라드곡이 아닌 이승환의 롹 소울이 가득 담긴 <고함>이어서 더 반가웠고, 베스트 가수를 공유하는 그녀는 곧장 나의 베스트 친구가 되었다.


앤과 다이애나

고3 때 어른들이 부풀려 놓은 대학생의 이미지는 술이나 퍼마시고 탱자탱자 놀면서도 저절로 다이어트도 되고, 점점 이뻐지고, 수포자도 수학 과외를 할 수 있는 마법을 부리고, 자연스레 어른이 되어가는 만병통치약이었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어 처음 학교에 가보니 고등학교 때랑 별반 다를 것도 없이 어린애 취급이었고,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다가, 수업마저도 필수과목과 수강 신청의 압박 때문에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조금 다른 형태의 일상일 뿐이었다. 신입생 전체가 모여하는 오리엔테이션이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의 열정이 대단하다. 선배들이 프로그램 전체를 기획하고 진행까지 했던 거 같으니… 그들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해얄지. OT 일정은 생각보다 훨씬 빡빡했다. 그 기간 그녀 옆에 붙어 있지 않았다면 예상 밖의 갑갑한 상황을 어떻게든 뛰쳐나가려 했을지도 모른다. 대학 생활의 환상을 산산이 깨부순 거대한 2박 3일 수련회 동안에도 다이애나는 즐거움의 요소들을 찾아냈고, 딱히 무엇을 찾아내서라기보단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첫눈에 ‘이 사람이다.'란 걸 알아보았고, 시간과 공을 들일 것도 없이 순식간에 푹 빠져버렸다.


지난 20년간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 순위를 꼽으라면 그녀가 들어간다. 미식가이면서 심미주의자에 통찰력이 뛰어났다. 언제나 맛있는 것들의 조합과 새로운 맛있는 것을 찾아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고전 영화들을 줄줄 꿰고 있었으며, 미니홈피를 넘고 넘으며 아름다운 음악을 찾아내고 수집하고 전파했다. 언젠가 한 번 그 애의 친한 사랑스러운 미나와 나 셋이 [바벨]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내게 그 영화를 봐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브래드 피트였다. 모로코와 LA, 멕시코와 일본을 넘나들며 언어가 뒤섞이고 이야기가 얽히는 서사는 너무 난해했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끝나고 미나와 나는 기진해서는 “머리 아프다.” 혹은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지?”하며 멍해져 있었다. 혼란 속에 아무 말이나 내뱉던 우리를 보며 한참 조용히 있던 다이애나는, “바벨탑 사건처럼 저 사람들도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 같아.” 하고 간단히 정리해 버렸다. 애송이들 앞에서 영화 내용 한방에 정리한 것 정도는 그렇게 대단한 신화가 아닐지 모르지만 다이애나는 사람에 대해, 상황에 대해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 번씩 던지는 말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릴 때가 많았다. 이렇게 쓰고 나니까 다이애나 예찬론으로 흘러갔는데, 우리는 늘 비슷한 후회를 하면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대충인들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능력에 더해진 뭇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인간적인 면은 반전 매력 포인트였는지도.




그녀에게는 부족한 단 한 가지는 남자 보는 눈이었다. 23년간 고이 간직해 온 순정을 웬 이상한 놈(최대한 순화한 표현)에게 주고 말았다. 매력이 철철 넘치는 데다가 누구에게도 격의 없이, 편견 없이 다가갔고 거기에 해사한 웃음까지 가졌다. 그런 다이애나를 연모하는 남학생들이 많았다. **대의 연인이라고 훗날을 회고하자 남녀 비율(당시 7:3?)이 비정상적인 곳이라서 그랬던 거라며 겸손의 미덕까지 보였다. 숱한 남학생들의 애정 공세에도 ‘친구까지'라는 철벽술로 죄다 방어하고 지켜낸 순정이었다. 그녀의 슬픈 연애사를 다 읊을 수는 없는 것이, 그녀가 연애를 시작한 시기는 나의 휴학 시기와 겹쳤기 때문이다. 아주 자주  연락을 했지만 연애가 시작되고 그 빈도가 뜸해지기도 했고, 어쩐지 다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 학기가 지나고 여름 방학 즈음 만난 그녀는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내 것도 아닌데 곱게 간직한 마음이 허비된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입장을 더하고 빼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딴 세상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기에 마냥 축하만 해줬다. 그녀가 어렵게 쟁취한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만을 바랐다.

다음 해 학교로 돌아갔을 때 그녀가 휴학했다. 봄이 채 오기 전에 이별했다고 했다. 짧고 허무한 연애였다. 멀리 있는 그 애가 혹시 어떻게 될까 매일 전화를 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일. 간직해 온 마음을 어떻게 남김없이 쏟았는지 알았다. 안 그래도 아담하고 마른 체형이었던 그 애는 자꾸만 살이 더 빠진다고 했다. 당장 올라가서 밥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그렇게 차디찬 그 애의 겨울이 가고 성실히 봄은 오고, 꽃은 피고, 슬며시 여름이 더위를 몰고 왔다. 여름의 기운을 받아서였을까 다시 만났을 때, ‘아, 이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하고 안심이 될 만큼 생기가 돌았다.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매일 저녁 전화 한 통은 걱정과 조바심, 자칫 친구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 대신 다시 일상의 수다로 채워졌다.




다시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2년은 길었다. 우리는 다른 세계를 살다 고향에 돌아온 여행자처럼 서로를 맞았다. 나를 다시 만났듯 그 사람도 다시 만난 다이애나는 우려와 만류에도 그 사람에게 돌아갔다. 어쩌면 다이애나에게 고향은 학교도, 나도 아닌 그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것은 다이애나 인생 최악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아무렴 어때, 대학시절 내내 채웠던 연애를 막 끝냈기 때문에 사실 경황이 없었다. 헤어진 적 없다는 듯 다시 연애하던 나의 베프 커플은 나를 위로해야 했다. 다이애나마저 이별로 허우적 거린다면 상황이 감당이 될 것 같지 않아 모른 척 눈 감았다. 말린다고 말려지지 않을 것도 뻔했다. 그래도 말렸어야 했다.

빛 바랜 그 날들

우리의 대학 시절의 끝부분은 얼룩덜룩했다. 이별은 핑계였겠지만 졸업이랄지 취업이랄지 학점이랄지 어느 지점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않았다. 분노와 후회, 기막힘과 허무함, 배신감, 억울함, 자괴감… 갖은 감정의 격랑이 시도 때도 없이 덮치고 가서 휩쓸려 가지 않으려 무엇이라도 붙들어야 했다. 한 학기는 ‘긴 연애를 끝낸 자'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옆에 있어 줬고, 다음 학기엔 연극 전공하는 친구의 졸업 공연에 덜컥 참여했다. 사회복지학과 학생이 마지막 학기에 할만한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정신 못 차리고 흔들리는 동안 다이애나도 마냥 행복한 시간을 보내진 못한 것 같았다. 학기가 끝나고도 우리는 한참을 각자의 자취방에 남았다. 각자의 방에서 유령처럼 지내다 한 번씩 만나서 무력한 서로를 보며 안심 아닌 안심을 했다. 끝도 없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다음 걸음을 떼는 의무를 보류했다.

나는 어영부영 취직했고, 다이애나는 시험 준비를 했다. 나는 여러 번 소개팅을 했고, 한 번의 짝사랑에 실패했다. 그리고 진국에게 정착했다. 그러는 동안 다이애나의 연애는 꽤 길게 이어졌다.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헤어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이렇다 할 이유도 감정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연애는 결국 너덜너덜해져서는 끝이 나고 말았다. 첫 아이를 낳고는 이별 따위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일생일대 위기에 봉착한 나는 진국의 아량으로 다이애나를 만나러 갔다. 우리는 예수원으로 향했고, 노동 공동체인 그곳에서 우리는 예배도 노동도 하지 않고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아주 천천히 걸으며 후회를 곱씹었다.


예수원행은 그 당시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그 시절을 함께 했다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오르락내리락했지만 결국 정상 궤도를 탔고, 본가에 올 때마다 나와 나의 아들을(민트에서 민트와 쪼꼬가, 민트, 쪼꼬, 마빈이 될 때까지 꾸준히) 만나러 오거나 내가 가면 만나주었다. 나는 다이애나의 배우자를 위해 기도했다. 무엇보다 다이애나를 ‘귀히' 여겨 줄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내 주변에 괜찮아 보이는 남자들을 몇 번 소개 해 주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실패했다.




그러다 어느 날, 꿈을 꿨다. 의미 있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었다. 다이애나가 내가 아는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했는데, 기어이 나를 속이고 사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데이트하는 모습을 꿈속의 나는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침 다이애나가 본가에 왔고, 또 나를 만나러 와 주었기에 애가 정신없게 하는 와중에 꿈 이야기를 했다. 재미있게 듣고 난 다이애나가 말했다.

“그 꿈 신기하네.”  

“뭔데? 니 연애하나?”

“어.”

“헐. 내가 아는 사람이가?”

“어.”

그렇게 다이애나는 내가 아는 그 사람과 결혼하여 알콩달콩 살고 있다. 그들의 가정생활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다른 건 모르겠고, ‘귀히 귀히' 여겨주는 사람을 만난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의 이십 대는 뜨겁다 못해 타버려서 잿빛으로 흩날려 버린 시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 여름 소나기처럼 시원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녀와 비 오는 캠퍼스를 춤추며 달리던 그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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