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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May 31. 2020

내 꿈은 노벨 문학상

 

친구에게서 책 두 권을 빌려왔다. 친구가 없는 집 탁자 위에 벚꽃 분홍, 개나리 노랑 두 권이 나란히 놓여 있어 눈길을 확 끌었다. 그중 한 권이 읽고 싶던 책이고,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이 또 한 권이다. 말하지 못하고 가져왔기에 나중에 문자 했더니, “내 친구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알아듣지 못했는데, 작가가 고등학교 친구라 했다. 80년대생 작가들은 이미 중견 작가이다. 나는 80년대 중에서도 초반생이니 중견까지는 아니더라도, 등단은 아니더라도, 뭐라도 썼어야 할 거 같은데, 습작이랍시고 써 내려가는 글을 보면 현타만 온다.  



외동으로 자라면 혼자 놀기에 통달하게 된다. 부모님은 요즘 엄마 아빠들처럼 아이에게 어떤 놀이가 발달과 즐거움 두 가지를 다 충족시켜줄 수 있나 고민하며 밀착 마크해 놀아주지 않았다. 장난감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언제든지 원하는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미디어도 없었다. 까닭인지, 어린 나의 즐거움은 먹는 것에 있었다.

지금은 부엌이 입식이라 꼬맹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공간에 음식들이 보관되어 있지만 어릴 때 우리 집 부엌은 미닫이 방문을 열어 계단을 두세 개 내려가는 도장이 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었다. 부엌의 공간 구성이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난방이 되지 않았고 실외와 문 하나로 부실하게 막혀있는 공간이라 여름 외에는 음식을 부엌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보관하곤 했나 보다. 어느 날 양푼이에  덮어 놓은 그릇은 들쳐져 있고 들어 있던 두부에 파 먹은 흔적이 있었다. 쥐가 들었나 싶어 엄마는 두부를 버렸다. 하지만 뜻밖에 가까운 곳에 있었던 범인은 며칠 뒤 현장 검거되었다. 조용히 부엌으로 나가 손으로 두부를 파 먹은 것은 네 살의 앤이었던 것이다. 두부를 파먹다 발각된 아이의 이름으로 싱크로율이 너무 떨어진다. 옥분이, 정도가 어울리려나...

어느 날은 애호박을 생으로 와작와작 씹어 먹길래, 엄마가 깜짝 놀라 "앤, 왜 호박을 먹고 있어?" 했더니, "이거 오인데요?" 하며 계속 맛있게 먹었다고도 한다. 다섯 살 때부터 일 년 반 정도 살았던 섬마을에선 마을 친구들이랑 같이 생양파를 간식으로 먹고, 수숫대를 심심풀이로 씹으며 놀았다. 이 부분을 읽는 진국씨는 분명, 역시 너는 시골 여자였다면서 피식 웃을 것이다. 육지에서 배로 실어 온 치즈는 너무 많이 먹으려고 해서 하루에 하나인지 두 개로 할당량을 정하고 냉장고 윗부분에 배치되어 스스로 꺼내 먹을 수 없게 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간식도 먹고, 친구들 따라먹고, 몰래 먹고, 알아서 찾아 먹고, 그냥 닥치는 대로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먹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살던 인생에 임계 국면이 찾아왔는데,

나 글씨 쓸 줄 알아요.


하면서 "우유"를 써 보였던 것이다. 엄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글씨를 가르쳤고, 그때부터는 책은 중요한 놀잇감이 되었다. 그즈음 해서 식을 줄 모르던 먹성은 풀이 확 꺾여 심지어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단 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떠올려보면 어릴 때 집에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제일 첫 책은 월트 디즈니의 동화 전집이었는데 권수가 꽤 되어서 밤비와 미키 마우스의 친구들, 백설 공주와 신데렐라가 나의 첫 주인공들이었다. 말도 못 할 때부터 엄마 아빠가 읽어주시던 책이라 글자를 모를 때도 내용을 줄줄 꿰고 있었는데  상관없이 읽고 또 읽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어서 결국엔 누구에게 물려주지도 못하고 버렸다. 허영심 많은 데이지의 이야기나 미니 공주가 아주 겹겹이 쌓아 올린 매트에도 불구하고 가장 바닥에 깔려 있던 콩 하나에 잠을 못 자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아직도 장면 장면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에 엄마가 어린이 책 방문판매를 하던 친구 엄마한테 만화로 된 한국사, 세계사 전집과 위인전기를 사 주셨고, 한 권씩 사다 주시는 어린이용 고전들을 읽었다. 절약이 인생의 핵심 철학이었던 엄마는 하나뿐인 딸이 책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서 박하게 책을 사 주셨다. 집에 있는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친구들이나 친척 집에 놀러 가면 새로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엔 꿈이 참 많았는데, 하나 같이 허황하고 가능성이 희박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한동안 이사도라 덩컨 같은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 했는데, 발레는커녕 춤의 ㅊ도 배워 본 적 없었고, 노트인지 어디에 짤막하게 쓰여 있는 소개를 본 것이 이사도라 덩컨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피아노에 전혀 재능이 없었지만, 피아노를 배우는 김에 피아니스트도 되고 싶었고, 아주 잠깐 미술학원에 다닐 땐 화가를 꿈꾸기도 했다. 또 몇 년 뒤 밥 로스 아저씨의 그림에 감명을 받아 수채 물감으로 유화를 따라 그리며 잊었던 화가의 꿈을 되찾기도 했다. 그렇게 허황하고 수많은 꿈을 스쳐 지나며 자라고 있었고 숱한 이야기를 품은 책들은 늘 꿈과 상관없이 나의 동무였다.

읽는 것에 더해 쓰는 것에 마음을 붙이게 된 것은 숙제로 쓰던 일기가 나를 달래주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즐겁고 행복한 일을 기록하는 것도 좋았지만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일기만큼 마음을 잘 알고 위로해 주는 것은 없었다. 내가 쓰는 내 이야기이니 어련했겠냐 마는..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향유하는 것, 나 한 사람 위로하는 것에 넘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겠노라 생각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고, 그 후로도 이것저것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이 끼어들긴 했지만, 마음 한 부분에 늘 "글 쓰는 사람"을 품고 살았다. 비슷한 시기에 '세계 1등 작가'(그 당시 내 개념으로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에게 노벨 문학상이라는 상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기왕 하는 거면 일등이 되고 싶었다.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이 꿈이라니 아주 성취 지향적이고 야심 찬 꿈이다. 어린 시절 꽤나 야망가였나 보다.  



원대한 목표에 비해 그걸 이루는 길을 찾는 일에는 너무 안일하고 소극적이어서, 글이라고는 일기와 가끔 교내에서 하는 글짓기 대회 -그것도 전교생이 숙제처럼 써내야 하는- 에 내는 것이 전부였다. 교내에서는 제법 상을 받기도 했지만 어떤 작가의 전기에 쓰일 법하게 백일장이라는 백일장은 죄 휩쓸고 다닐 정도로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었다. 그나마도 중학교에 가선 문예 창작반 아이들에게 밀려났다. 그 당시 왜 문예 창작반 활동을 하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대신 썩 잘 치지도 못하는 실력으로 합창부 반주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예 창작반인 아이가 쓴 글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 “이거 진짜야?” 돌아오는 대답. “아니, 지어서 쓴 이야기야.”

두둥. 그… 그렇구나…. 지어서 쓸 수도 있는 거구나!!

즐겨 읽던 소설들은 죄다 가공의 이야기였는데, 글짓기 대회에서 굳이 정직함을 고수하려 했던 것일까. 문예 창작에서 “창작”이 그런 뜻이었는데,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그렇게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고 훌쩍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열린 통일 글짓기 대회에서 친구를 통해 얻은 통찰을 실천에 옮겨 보았다. 탈북 의사인 이웃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때 생각에도 이거 좀 진부하다 싶었는데 불구하고 상을 받아 다른 두 명과 함께 도내 백일장에 나가게 되었다. 살던 곳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댐이 크고 아름다운 도시의 넓은 잔디밭에서 대회는 열렸다. 국어 선생님의 차를 얻어 타고 친구들과 뒷좌석에 앉아서는 어떤 글을 쓰리라는 구상보단 “우리만"의 소풍에 설레 정신없이 재잘거리기 바빴다. 댐을 따라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은 아직 굽이진 인생을 모르던 그 시절 나에게 아름답기만 한 풍경이었다. 대회장 격인 잔디밭에서도 5월 해사한 봄기운에 들뜬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고 제시된 주제로는 아무런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학교를 대표로 거기까지 가서 바람 쐬며 앉아 있었으니 억지로 떠올려서라도 써 내려가야 했다. 헌데 시간과 상황이 주는 압박감은 상상력에 제동을 걸고 표현을 삐걱거리게 했다. 그렇게 찾아온 기회를 시원하게 말아먹고도 아무런 가책도 후회도 없이 선생님이 사주시는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매쉬드 스위트 포테이토를 처음 맛본 감동만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기회를 먼지처럼 흩날려 버린 것에 대한 일말의 가책도 없었던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난 참 맹탕 맹탕한 사람이다.



중학교 때까지 엄마가 내 인생의 전반을 통제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H.O.T와 젝스키스로 나눠질 때 소리엘과 김수지를 들었다. 어른들이 보는 드라마는 허락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당시 ‘청소년’ 용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있었는데, 이름하야 “청소년 드라마 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지나치게 엔터테인먼트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더욱 그런 성향이 강화되신 것 같은데, 맡은 일, 유익한 일, 신앙적인 일이 아니면 모두 “쓸데없는 일”로 생각하셨던 거 같다. 그나마 세상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는 학교와 친구들이었다. 학교 도서관엔 엄마가 안 사주는 책들이 있었고 학교 점심시간엔 엄마가 못 듣게 하는 최신 가요들이 나왔다. 친구 집에서 뒹굴거리며 당시 소녀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늘 푸르매와 서지원이 나오는 만화들을 봤고, 친구가 좋아하는 신생 아이돌의 정보를 함께 탐닉했다. 그 당시 보이그룹, 걸그룹 가수들이 등장하여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겼던 거 같은데, 소녀들은 대부분 보이그룹의 팬이었다. 전학을 가자 아이들은 나에 대한 그 어떤 것보다 “H.O.T” vs “젝스키스(SECHS KIES - 그때는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독일어였다!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젝스키스를 고르는 건데!) 중 누구 팬인지를 궁금해했다. 사실 덕질도 해 본 사람이 하지 학교에서만 겨우 듣는 그 노래들과 한정된 정보만으로 그들의 팬이 되기는 어려웠고, 보이그룹 취향도 아니었던 거 같다. 둘 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히자 조용히 한 명의 친구가 다가와 “신화”를 소개해 주었다. 여튼 친구들은 실망과 희망을 동시에 보이며 나를 각자의 팬덤에 끼워 넣으려 시도했지만, 그들은 실패하고 나는 곧 떠났다.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릴 자유가 있는 곳으로.  


담임선생님은 반대하셨다. 이곳에 남아 지역 고등학교에 가서 내신을 잘 받고 농어촌전형까지 하면 훨씬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딜 가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큰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엄마를 떠나고 싶기도 했다.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는 역시 시골에 있는 자립형 기숙학교였고, 시골 벗어나기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 조건은 충족했는데, 담임 선생님의 예상도 적중해 버렸다. 큰 물에서 만난 똑똑한 아이들 기에 눌려 공부를 포기해 버렸던 것... 그때 시골에 남았으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으려나?


대학 입시는 좀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내 인생의 르네상스가 펼쳐졌다. 특히나 가요의 신 지평은 열리고야 말았다. 더는 엄마의 간섭이 없었고, 다양한 취향과 음반을 가진 친구들이 한 방에 살았다. 처음에는 친구들 테이프를 빌리기도 하고 당시 완전 신문물이었던 MD에서 친구의 컬렉션 전체를 감상하기도 했다. H.O.T와 젝스키스에서 신화와 god로 이어지는 아이돌 댄스그룹이 아니어도 선택할 수 있는 가요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순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순간의 경이와 견줄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가, 세상 반대편(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 꽁꽁 숨겨져 있다 쫜, 하고 나타나 주니 감격스러울밖에..  

이승환을 시작으로 토이, 김동률(전람회) + 이적(패닉) = 카니발, 자우림, 박효신 등을 친구 따라 알아가던 플레이리스트는 점점 나만의 색깔을 가지기 시작했고, 안 맞는 주파수 찾아 방안을 헤매며 듣던 FM 플러스와 음악 도시를 통해 팝송을 비롯한 세계의 음악과 인디음악, 미처 만나지 못했던 옛 명곡들까지 섭렵해 가며 풍성해져 갔다.


패닉, 얘기로 잠깐 빠져보자. 엄마가 구독해서 보던 <낮은 울타리>에서 패닉을 사회 부적응자가 만든 마귀의 음악 취급했었다. 패닉의 노래를 들어보지도 못한 내게 온갖 오해와 편견부터 심어 주어 처음부터 들을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달팽이>와 <왼손잡이>, <Rain>,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이 명곡들을 평생 못 듣고 살 뻔했다!!!!!!! 신상언 아저씨(이제는 할아버지)는 아직도 사명감을 가지고 기독교인들과 대중문화 사이에 담을 쌓는 일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것 같다. 하아... 기독교의 맹점은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세계를 양분하는 흑백논리에 너무 쉽게 빠지는게 아닐까... 이런 이야기들은 차차 해보도록 하자(이것은 본편 사이에 끼워 넣은 예고편?).


그 시절에 열린 것은 가요의 세계만이 아니었다. 그곳은 자율과 신앙 두 가지를 강조하는 학교였는데, 자율 부분의 한 일환으로 동아리 활동을 아주 장려하는 편이었다. 몇 곳을 고민하다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 연극을 하며 알게 된 문학의 세계는 다양했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는 학교 방침에 따라 자율을 확 허용하셨는데.. 그렇게 보게 된) 드라마 속의 사랑 이야기들은 얼마나 영롱한가?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는 애니메이션의 세계와는 다른 깊이와 폭을 가지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역시 티브이에서 나오던 것이 다가 아닌 무궁한 영역이었다. 그 모든 것을 향유하면서도 정작 문학에 직접 관련된 것과는 거리를 두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고 끝까지 꿈꾸고 싶어서…? 대학 지망은 두 곳을 국문학과로 하고 나머지 한 곳을 상담심리학으로 했는데, 모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을 선택했다. 그렇게 꿈만 노벨문학상이었던 나는, 문학으로 향하는 길은 차단하고 멀찍이 거리를 두며 세월을 보냈다. 물론 등단한 작가들의 책은 열심히 읽었다. 그들의 책뿐만 아니라 약력도 유심히 살폈다. 몇 살인지와 무엇을 전공했는지가 가장 큰 관심이었는데, 한동안 나이에서는 안심이 되었지만, 전공을 보면 낙담됐다. 난 왜 국문과를 가지 않았나, 여러 번 자책했던 거 같다. 마치 그게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도 되는 양.  



결혼 이후의 삶은 아주 거센 폭풍 속 같았다.

아들 셋을 낳고 키우며 매일이 전쟁이고 난리고 인생에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일들과 병들을 겪었고 말들을 들었다. 그렇게 보내고 나니 마흔이 코 앞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어느덧 불혹이라는 두 글자가 눈앞에 턱 하고 놓여 있다. 현대인들이 늦게 자라고 늦게 늙어서 그런지 여전히 수많은 유혹 앞에 나약한 인간인데 불혹이라니!  여전히 내 꿈은 노벨문학상인데…(응?) 아이들을 키우며 자주 생각했다. 꼭 써야지.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쓸 거야. 뭐가 어떻게 되든, 누가 뭐라고 하든, 이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나”인데, 쓰지 않으면 아이들을 키우며 찾고 싶었던 “나”는 영영 찾지 못하고 스러져버리는 거야.

그래서 매일 좌절하면서도 다시 쓰게… 되었… 다.


언제까지고 꿈꾸며 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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