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글쓰기는 박제된 바나나였다. 신선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영원히 완전할 것 같은 모양으로 눈앞에 있지만 정작 하얀 속살은 까 보지 못하고 맛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나 그려내야 하는 살아 있는 채로 죽어버린 바나나.
아마 3~4학년 때부터였을 것이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문학가'라고 대답했다. 문학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던 시절(지금이라고 뭘 아는 건 아니겠지만) 문학이라는 거대한 꿈을 품었다. 너무 큰 것을 그려서일까? 어쩐지 그곳에 닿으려는 치열함은 없었다. 입시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고3 시절 국문과와 심리학과 모두 합격하였는데 선택은 심리학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문학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치워버렸고,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그렇듯 아른거리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국문과를 갔으면 좀 더 빨리 글을 쓰는 길로 들어섰을까, 가보지 않은 길이라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진작 절망으로 문학과 담쌓고 도망쳐 버렸을지도 모를 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 누군가에게는 별생각 없이 들어선 길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신기루처럼 잡을 수 없는 슬픔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오랜 헤맴 끝에 찾아낸 오아시스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굳이 갈 필요 없는 척박한 사막일 것이고.
자그마치 10년이다. 원 없이 엄마로 살아왔다. 엄마가 되는 일은 인생 여정에서 한 번도 제외된 적 없는 관문 같은 것이었다. 잘 닦인 도로인 줄 알고 가볍게 들어섰는데 알고 보니 험한 돌길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였다. 숨 가쁘게 헤매며 10년을 지나고 보니 이제 막내가 한국 나이로 여섯, 곧 만으로도 다섯을 채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주말 아침 누가 일어나 애를 보느냐의 문제는 공론화되진 않았지만, 괜히 눈치를 보면서 기싸움을 하는 주제였다. 남편은 언제나 철야에, 야근에 잠이 부족했고, 잠 부족이야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이들이 늘 같이 있는 엄마를 택하는 통에 기싸움이 무의미하게 아이들 기상 시간에 맞춰 일어나야 하는 쪽은 거의 나였다. 이제 더는 그런 눈치 싸움을 하지 않는다. 자고 싶으면 둘 다 늦잠을 잔다. “얘들아, 아침은 시리얼이야!” 물론, 온 집안을 운동장처럼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는 소리와 싸우고 웃고 재잘거리는 소음을 견디며 반쯤 자는 잠이지만 잘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고 엄마 손 갈 일이 줄어들자 오래 잊고 살았던 ‘나'라는 사람이 인생에 재등장했다. 그냥 엄마이면 충분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기쁨보다 불안이 왔다. 에너지도 재능도 많은 어떤 사람들처럼 엄마이면서 이것도 저것도 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나의 10년은 세 아이로만 꽉 채워 있었다.
막내가 말이 아닌 말을 하는데 신통하게도 알아들으면서 아이 재롱을 보는 건지 내가 재롱을 피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영상이 3년 전 이맘때쯤이라고 친절한 구*신(그분은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의 알고리즘이 알려줬다. 아이들 대하는 내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 깜짝 놀랐다. 그렇게 세 아이와 함께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깔깔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지난 시간에 대해 아쉬운 소리를 할라치면 열에 아홉은 ‘애 셋 키운 게 대단하지 그보다 대단한 일이 어디 있으려고’ 하며 진심 어린 감탄과 위로를 보낸다. 그들의 마음이 고맙지만, 그 세월이 아이들을 이만큼 자라게 해 준 것 역시 고맙지만, 마음이 거글 거글 한 것이 개운치가 않다. 아이들이 준 행복을, 사랑을 어디에 비할 수 없는 것과 별개로, 이만큼 자란 아이들은 저들대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텐데, 십 년의 틈을 어떻게 메워 다시 나의 삶을 꾸려갈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다. 재능도 꿈도 많았던 시절을 지났고, 이제 와 엄마라는 이름을 딛고 일어서려니 막막함에 헛웃음이 나는 여자들. 그래서 2020년 초에 친구들과 함께 <뭐라도> 해보려는 모종의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기보단 물러서는 일에 익숙했던 터라 말을 꺼내다 덜컥 ‘친구 사이만 망치면 어떻게 해’ 작은 염려에 막혀 시작도 해보기 전에 도망쳤다. 그러다 눈앞에 바나나 한 송이가 턱,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덥석, 주었다.
바나나를 만난 시기기 기가 막혔다. 봄에 아점(브*치)이라는 플랫폼에서 글쓰기를 시작하고 조금씩 써 가던 중 슬슬 지치고 동력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즈음에 바나나 기차에 탑승해 2주에 하나씩이라도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뿐 아니라 함께 하던 사람들의 글 간격도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 11월이었고, 그때부터 계절성 우울증이 시작됐다. 지독한 나날이었다. 와중에 아주 느리게라도 쓴다는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My Fresh Banana>였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접어둔 속마음을 슬며시 꺼내 보이듯 써간 글들이 홈페이지에 빼곡히 모였고, 동시에 다양한 List들을 메일로 주고받으며 서로 알아갔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글만 쓰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어렸을 적 펜팔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펜팔로 친구를 사귀는 기분이 이런 것이려나. 그러다 당장 생활을 꾸려 갈 수 없게 끝도 없이 밑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출간 이야기가 나왔다. 반짝, 떨어지는 한 줄기 빛. 모두가 출간에 박차를 가하게 되면서 그 흐름을 타고 나도 일어났다.
글의 단위가 너무 밭아. 문장 단위로 읽히니까 쉽게 읽어지지가 않아. 최소한 문단으로 묶어줘야 하지 않을까? 너무 멋을 부린 것 같아. 결말에 힘이 없어. 흐릿해.
촌철살인, 냉혹한 논평을 쏟아 내시는 분은 같이 사시는 분 중에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한 분, 그렇다, 바로 나의 남편이다. 타골(打骨) 편 선생께서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성장만을 바라는 무한한 애정으로 뼈를 때리는 직언만을 날리신다. 아쉽게도 반박할 말이 없다. 재론의 여지가 없이 맞는 말만 하는 타골 선생이 야속하기는 했지만, 그의 냉정한 평가가 필요했다. 솔직한(보완점에 치중한) 감상평을 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고, 다른 누구보다 남편이 하는 것이 가장 상처를 덜 받을 것도 사실이었다. 선뜻 그의 평가를 인정하면서도 ‘단어와 문장의 힘으로 끝까지 밀고 가보고 싶었다.’라는 변명을 슬쩍 얹었다.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좋은 글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요원하게 여겨졌고, 그럴수록 단어에, 문장에 기대어 쓰다 보니 쓸 때도 읽힐 때도 갑갑한 글만 나왔다. 사념이 넘쳐 길을 찾지 못하는 편이다.
술술 잘 써지는 때가 있다. 청소기를 돌릴 때, 식사가 끝난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를 할 때, 빨래를 갤 때 머릿속 펜은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간다. 이대로라면 몇 편도 후딱 쓸 수 있겠다. 꽤 재미있고 감동적인, 괜찮은 글이 써질 것 같다. 아이들을 겨우 재운 고요의 시간 노트북 앞에 앉아 낮 동안 써 내려갔던 글들을 설레는 맘으로 풀어내려 한다. 이상하게도 문장과 문장이 기름칠한 듯 매끄럽던 가상의 필력은 자취를 감추고 꽉 막힌 하수구처럼 좀체 내려가질 않는다. 하얀 종이는 한참을 비워둔 채 인터넷 세상 이곳과 저곳을 방황하다 낮에 떠올랐던 이야기를 한꺼번에 몇 개나 내 질러 놓고 여기서 한 문장, 저기서 한 문장 쓸 때도 많았다. 그렇게 억지로 완성한 글에도 친구들은 찾아와서 하트를 눌러주거나, 꼬박꼬박 댓글을 달아주며, 편 선생과는 좀 다른 방법으로 격려를 보냈고, 막 발을 떼는 시점에서 두 가지 모두 큰 힘이 됐다.
노오란 바나나를, 달큰한 향이 풍기는, 꼭지를 툭 꺾어 주욱 까 내리면 부드럽고 폭신한 과육이 드러나는, 베어 물면 달콤한 포만감을 선사하는 진짜 바나나를 찾아본 첫 시도였다. 이제 가만히 두면 갈색 점점이 보이다 금세 먹지 못할 지경으로 갈변해 버릴 것이다. 부지런히 사고 살피고 먹고 해 보자.
내가 지켜질지 바나나가 지켜질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