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글버글 끓어오르던 것들이 넘쳐 노트를 가득 채웠다. 정작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모른 채 닥치는 대로 썼다. 얼마나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통은 이 작은 방에 갇힌다. 신음이 세어 나간다 해도 결국 이 방의 것이다.
부활절 방학(Osterferien)이 지나고 아이들은 학교와 유치원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졸업반인 큰아이만 오전 수업을 하고 돌아왔다. 아침부터 집 안은 전쟁터다.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금방 전투태세로 전환한다. 고자질과 고성이 터져 나오는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아이들을 불러 소파에 앉았다. 진지한 표정과 지친 목소리로 아이들을 타이르고 나서 일어서려 했다.
“악!”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작년 이맘때, 외출 제한이라는 행정명령이 떨어졌고, 가족들이 모두 집에 머물게 되었다. 가사노동의 강도가 세 배쯤 세진 것 같았다. 그래도 충만한 날들이었다. 연말에 한국을 방문했다. 몸도 마음도 풍성해진 상태로 돌아왔고, 고국 방문의 영향은 여전히 유효했다. 화사한 봄날은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했기에 우리는 모두 의지를 불태우며 상황을 전복했다. 만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마음과 상관없이 몸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좌골신경통. 제대로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하는 상태로 한 달 넘게 보냈다. 회복으로 가는 기간이었지만, 첫 주엔 거의 1, 20분 단위의 쪽잠을 자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고, 그다음 주에도 기껏해야 2~3시간 자는 것에 안도해야 할 정도로 아팠다. 한 가지 자세를 지속할 수 없었고, 누워있는 중에는 어떤 자세에도 아파서 잘 수가 없었다. 이 신경통의 고약한 점은 약도, 주사도 고통의 강도를 줄여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난생처음 신경통을 겪어 봤으므로 모든 종류의 신경통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다.
왼쪽 엉치뼈부터 아래쪽으로 고통이 번져나가며 다리가 꺾였을 때 든 생각은 한 가지였다.
“망했다!”
겪어본 이유로 더 괴롭고 두려웠다. 게다가 지난번처럼 생의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겨우 척박한 겨울을 지나왔고, 펴지지 않은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서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장애물은 쉽게 절망으로 몰아갔다. 지난번보다 쉽게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만이 잡을 수 있는 희망의 징조였다.
밤만 잘 버티면 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잘 버틸 수가 없었다. 피로는 몰려오는데 잠들기 위해 어렵사리 찾은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게 불가능했다. 밤새 끙끙거리며 섰다 앉았다 엎드리기를 반복하며 울었다. 엄마를 계속 불렀다. 엄마한테 들리지도 않을 텐데. 6시간 간격(인 줄 알았더니 8시간이었다)으로 복용해야 하는 진통제를 시간을 당겨 먹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침이 오자마자 병원을 알아봤다. 작년에 갔던 병원은 멀기도 했거니와 가장 가깝게 잡을 수 있는 예약이 열흘 뒤였다. 내가 알아본 병원은 전부 실패였고, 남편이 알아본 병원에서 다음 날 예약을 잡아줬다. 아플 때 바로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은 환자 입장에서 가능성을 차단하는 절망감을 준다. 병원을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오전 시간 진료 예약인 데다가 뮌헨 시내에 있는 병원이라 이른 아침부터 어린이 두 명을 챙겨 집을 나섰다. 스스로 운전을 할 수 없어 온 가족을 대동해야 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의사는 증상을 물었고, 작년에 좌골신경통(Ischias)을 진단받았었다고 말하니 진료실 간이침대에 눕혀 다리를 굽히고 발을 밀고 당기고 몇 가지 동작을 시켜 보더니, Lumboischialgie라는 새로운 진단명을 줬다. 구글 번역기에 써서 한국어로도 보여줬는데, “요통"이라 쓰여 있었다. ‘허리가 아픈 걸 요통이라고 하지 않나?’ 허리 아래쪽 약간 왼편에 주사 한 방을 놔주고 잠시 뒤 나아졌냐 물었다. 전혀 달라진 것 같지 않았지만,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고 대답했다. 남편이 옆에서 쟤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주사가 효과가 있길 바랐다.
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 걸어갈 수가 없어서 길에 주저앉았다. 남편이 달려가 차를 가져올 때까지 망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주사는 역시나 효과가 없으려나.
다시 긴 밤을 보냈다. 통증이 쉬지 않고 지속되어 잠을 잘 수 없었고, 어떻게든 아프지 않은 자세를 찾느라 몸부림쳤다.
진통제를 두 개 먹었다. 효과가 없었다.
침대 위에서 혼자 사투를 벌이다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높은 쿠션에 머리를 두고 두 다리를 한껏 몸 쪽으로 웅크리고 공벌레처럼 몸을 말아 안은 자세는 당장은 잠깐이라도 잠을 잘 수 있게 해 줬지만 깨고 나면 더 큰 통증을 유발했다. 다음 날 오전 내내 지쳐 잠을 잤다. 계속 깼지만, 피로도 견딜 수 없었기에 자고 깨기를 반복하며 꾸역꾸역 잠을 채웠다. 자는 동안엔 적어도 감각이 의식 저편으로 사라져 좋았다. 정신이 든 후 동네에 있는 물리치료실 세 군데에 전화를 돌렸다. 의사의 의뢰서가 있다고 말했지만 두 군데는 6월에 예약이 가능하다고 하여 5월 31일에 시간을 잡아주는 곳으로 예약했다.
그때까지 아플 수는 없다.
악재는 겹쳤다. 우리는 집을 샀고, 보수 공사를 거쳐 이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관련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남편은 계속 바빴다. 그와 중에 멀쩡히 잘 쓰던 식기세척기가 고장 나서 주인에게 말했다. 민원은 쉬이 처리되지 않았다. 정든 이 마을을 미련 없이 떠나게 해 줄 요량이었는지 감정이 상하는 일들이 생겼다. 내가 비명을 지르며 방에 드러누운 날 남편은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잘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남편은 다 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작은 싱크대(독일인의 싱크대는 정말 작다)에 설거지는 산처럼 쌓였고, 질세라 집안 전체에 스트레스도 쌓여갔다. 결국 남편은 긴급 보육/교육을 신청했고, 다행히 받아들여졌다. 이미 아프고 닷새가 흘러 다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방안으로 배달되는 밥을 먹으며 물과 약으로 버티는 일상이었는데, 남편과 민트, 마빈이 병원 간 사이에 쪼꼬와 함께 사과를 깎아 먹었다. 단 과즙이 듬뿍 흘러나오는 사과를 베어 무니 살 것 같았다. 사과 한 알에 이렇게 기쁨을 느낄 정도로 열악했나.
일어날 기약 없이 병상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쥐고 덤벙덤벙 잘라냈다.
머리를 감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나자 냄새가 났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샤워부스로 들어갔지만, 한쪽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어 기울어져 머리를 감았다. 그러고도 몇 번이고 자리에 주저앉아야 했다. 타이밍을 잘 잡았어야 했는데, 실패한 모양이다. 겨우 머리를 감고 나와 수건을 깔고 베개에 머리를 뉘였는데 젖은 머리 때문에 자꾸 한기가 들었다. 휴지통을 들고 다시 욕실로 가 미용 가위를 들었다. 한 움큼 쥐고 싹둑, 또 한 움큼에 싹둑, 다섯 번 만에 다시 단발머리가 되었다.
재난 상황이 닥치면 머리카락부터 잘라낼 것이라고 늘 다짐했었다. 모든 자원이 부족하고 생존에 집중해야 할 때 머리카락은 아무래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한국에서 살던 도시는 한반도도 더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난리를 일으켰던 진원지였다. 재난은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에 넘쳐났고, 현실에도 멀지 않아 보였다. 늘 대비해야 했다.
준 재난 상황을 맞아 머리로만 연습해오던 것을 실천해 본 셈이다. 상상하던 삭발이나 두피에 달라붙는 짧은 커트는 아니었지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생존을 위해 잘라 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차피 노동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통으로 널려 있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두 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노트북 대신 노트와 펜을 챙겼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충전해 준비했다.
하지만 통증이 계속될 때면 신경이 곤두서서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읽기도 쓰기도, 심지어 멍하니 영상을 보거나 무엇을 듣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온 정신이 고통의 감각에 집중되어, 온전히 고통을 경험하는, 고통이 지배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육체의 감각만 문제가 아니었다. 육체의 고통을 견딜 만할 때도 무력감이 의지를 앗아갔다. 자세를 바꾸며 뒹굴거리다 눈에 든 작의 창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던 소녀의 병실 풍경을 떠올렸다.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자세를 바꾸는 일조차 누군가의 손을 빌어야 하는 사람들, 고통을 견디는데 삶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어야 하는 사람들, 배변을 혼자 처리할 수 없는 낭패감, 그들은 얼마나 무수히 생의 의지를 다지며 경계에 절박하게 매달려 있을까.
시간마다 약을 챙겨 먹기도 쉽지가 않았다. 독일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준 용량보다 늘려서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다. 병원 예약은 멀고, 물리치료는 더 멀었다. 방법을 고심하다 외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에 있는 의사들이 의료 상담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앱으로 상담을 받았다. 교차로 먹을 수 있는 진통제의 종류와 성분을 알려주고, 1일 최대 복용량을 알려줬다. 두 개의 병명, ‘Ischias’와 ‘Lumboischialgie’의 차이도 설명해 줬다. 한국에서는 두 가지다 “좌골신경통"이라 통칭한다고 했다. 약을 늘린 덕분인지 그날 밤, 꽤 긴 시간 푹 잤다. 아프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주다 보니 경직된 등과 허리의 근육도 곧 풀어졌다. 하지만 시간과 용량을 계산하며 약을 챙겨 먹는 일, 더해 약을 버틸 수 있는 위의 상태를 위해 챙겨 먹어야 하는 끼니는 대번에 버거움이 되었다. 활동이 적으니 당연히 소화는 잘되지 않았고, 생존용 밥상은 입맛이 없는 상태에서 고역이었다. 어느 날, 오후에 먹은 약 한 알과 자기 전 넘긴 약 두 알이 목구멍에 걸린 느낌이더니 기어이 그날 약효를 보지 못했고 잠을 자지 못했다.
약과 주삿바늘과 통증을 반복하며 수치와 무력함과 절망에 맞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얼마나 삶을 굳게 붙잡을 수 있을까. 절로 힘이 풀려 놓쳐버릴 것 같은데…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먼지가 굴러다니는 걸 보며 몸이 나을 때까진 어쩔 수 없겠지 생각했는데 청소기가 돌아갔다. 민트가 청소기를 들고 이곳저곳 청소하고 있었다. 민트에게 세제 넣는 법, 버튼 위치, 세탁기 설정까지 설명해 주어 빨래도 부탁했다. 이미 걸려 있던 빨래를 걷어 와 내 방으로 배달시켰고, 헹굼을 한 번 더 해 세탁기 안에 들어 있는 빨래를 다시 너는 것까지 완료했다. 아빠가 바빠서 계속하지 못한 설거지를 민트가 했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아이들은 “네!”라고 활기차게 대답하고, 움직였다. 내 몫을 다하지 못해서 일어난 균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괴로웠는데, 공동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는 바리바리 반찬을 해서 보내왔다. 덕분에 가족이 몇 끼를 거뜬히 해결했다. 친구들은 매일 괜찮은 거냐 안부 문자를 보냈다.
남편이 배달해 준 점심은 정말 오랜만에 꺼낸 유아용 식판에 담겨 있었다. 식판만으로도 몹시 귀여웠는데, 부탁한 계란 장조림 두 개에 밑반찬을 골고루 담고, 밥은 고봉으로 쌓았다. 좋아하는 컵에 시원한 물까지 한잔 채워왔다. 그가 전한 위로인 듯싶다.
민트는 곧 10살이 된다. 이 아이가 와서 나는 엄마가 되었고, 지난 10년 엄마의 삶을 살았다. 10이라는 숫자는 아무래도 의미가 있으니 특별하게 축하해 주고 기념하고 싶었는데, 아픈 바람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그날을 맞았다.
“민트야, 생일인데 엄마가 케이크도 못 해주고 미역국도 못 해줘서 미안해.”
“낳아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죠!”
옛날이야기에 나올 법한 효자 대사를 읊은 사람이 진정 내 아들이란 말인가? 한 번씩 예쁜 말로 감동을 주긴 해도 약해진 몸과 마음에 아무런 대비 없이 흘러들어온 고백에 무장해제되어 웃음이 터진다.
그 사이 병원을 한 번 더, 주사를 한 번 더, 셀 수 없는 개수의 진통제, 작년에 물리치료실에서 배운 스트레칭 여러 번이 지나가고 난간을 잡고 걸었던 걸음을 기댈 것 없이 걷게 되었고, 구부정한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고, 깨는 횟수가 줄어든 양질의 잠을 다시 얻었다.
고통의 연대에 기꺼이 참여할 적극성을 추가로 얻은 것 같다.
독일의 봄이 더디다. 결국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 병상 일지라는 제목을 쓰는 것이 망설여졌습니다. 병상에 계시는 많은 분을 모욕하는 일이 될까 봐. 하지만 이 일이 저에게는 병상에서 지내는 분들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에게 가는 길을 열었기에 기꺼이 병상일지라, 써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