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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Jul 17. 2021

나의 첫 번째 공황발작

고장 난 마음 (1)

지금으로부터 3년 전 2018년. 미세먼지가 심했던 4월이 지나갔고

초록이들이 파릇파릇한 5월의 좋은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좋던 날.

그 날밤.

호흡이 가빠져오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더니, 급기야 어깨로부터 목 위로, 그리고 얼굴로, 뇌로

찌르륵 찌르륵 쥐가 나는 듯하다가 마비가 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세상이 암전 되었다.(블랙아웃 증상)

5분쯤? 10분쯤 지속되었을까? (아님 2~3분밖에 안되었을까?)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이었다.


아마 그날 이후 남편과의 대화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찌릿함을, 들숨날숨을 의식적으로 조정하지 않으면 호흡이 불가능한 상태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그 당시 딸 만 넷이던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을 더 낳아야 한다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요즘 세상에 '아들 하는 집이 어디 있어?' 하겠냐만은 '아들아들'하는 집이 여기 있었다. 우리 집 이야기이다.


첫째 딸을 낳을 때는 시댁 분위기가 그런지 몰랐었다. 27살의 나는 아가가 무조건 이뻤다. '남자? 여자? 성별?' 그런 건 애초에 내관심에 없었다. '아이면 그냥 아이지, 성별이 뭐야?'

우리 친정집이 아들딸 구분없는 분위기 여서 더 그랬을 수 도 있다.

둘째 딸을 낳던 2007년부터 시댁의 분위기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황금돼지띠라며, 아들일 거라 확신하는 시부모님 앞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아이가 생긴 형님과 나는, 서로 누가 먼저 황금돼지띠에 태어나는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 딸임을 밝힐 것인가 논의하기도 했다.

2010년에 태어난 셋째는 백호랑이띠이다. 역시 여자 아이였다.


2014년 태어난 넷째는 청마였던가? 기억도 잘 안 난다. (넷째 아이의 탄생기는 따로 기록하기로 하겠다. 한 페이지를 할애해도 모자란 이야기이다.)


2018년 마흔 살이던 나는 제법 큰 회사의 기획실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여러 개의 법인을 총괄하는 전략기획팀장으로 수많은 과업이 있었다. 회사와 육아 사이에 동분서주하면서 매일매일 영혼을 끌어당겨 살아내고 있는 나에게 '다섯째, 그것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이 생긴 것이다.


울어도 봤고, 소리도 쳐봤고, 달래도 봤고, 애원해보기도 했었다.

'나는 지금 애 넷도 너무 힘들다고. 매일매일 아이들의 욕구가 요구 사이에 나는 너무 지쳐. 아이들의 애정결핍도 나를 힘들게 한다고.' 아이들의 학습부진도 나 내 탓인 것 같고, 대가족 살림도 힘들다고. 나는 잠을 쪼개가며 일과 집안일을 병행하고 있었고, 주중 바쁜 업무로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주말에도 아이들과 함께 공원이며 바다며 다니며 미친 듯이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애원하기)


'당신은 예민하잖아. 늘 불만이 많잖아. 집이 어질러지는 것도 싫어하잖아. 밥상을 차려줘야 하는 남자잖아. 당신이 자상한 아빠가 아니잖아. 당신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걸 싫어하잖아. 당신은 돈 쓰는 것에 인색하잖아. 우리 집은 방이 세 개 밖에 없는데 애를 하나 더 낳자고? 여기서 더 뭘 어떻게 쪼개고 살아야 하는데? 왜 내가 그래야 하는데? 왜왜왜?? 나 힘들다고, 나 더 이상 못하겠다고. 나는 지금 있는 우리 애들 잘 키워내는 것도 벅차다고. 다섯째? 그럼 내가 회사 그만두고 애만 볼 수 있는 상황인 거야? 그거 아니잖아. 나 돈 벌어야 하잖아. 도대체 어쩌라고?' (비난하기)


나는 내 이야기만 하고 있었고,

남편은 남편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70세가 넘은 연로한 부모님의 평생소원은 '아들 손주'를 낳아 대를 잇는 것이다. 평생을 자기 부모를 공양하고, 자손을 이어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들을 바람을 외면하는 게 너무 힘들다. 그리고 나도 아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외롭다. 부모님 때문에 나도 중간에서 힘들다. 너무너무 힘들다. 그러니  네가 나를 좀 이해해주면 안 되겠니? 내편이 되어 주면 안 되겠니? 함께 다시 한번 시도해보면 안 되겠니? ○○야, ○○야, ○○야... 오빠 진짜 너무 힘들다.'


마흔이 된 며느리가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 낳을 준비를 안 하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난 시부모님.

2018년 설날 세 배 후 덕담 자리에서 시작된 '아들'이야기는 태백에서 서울로 공간을 옮겨와

5월이 다돼가도록 두어세 달 남편과 내가 얼굴만 마주 보면 서로를 이해해달라고 빌고, 애원하고, 화내고, 으르렁하고, 분노하다 대노하는 주제로 우리 가족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5월 어느 날. 남편이 최종 선고를 내리듯 선포했다.

'더 이상 이 결혼을 유지할 수 없겠노라고.'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 힘들고, 자신이 이렇게 힘들다고 하는데, 한 번도 자신의 의견에 '생각해볼게'하고 받아주지 않는 와이프에게도 너무 실망했다고. 왜 아버님과 너는 평행선이냐. 중간에서 본인은 너무 힘들다. 너의 손을 잡아 줄 수도 없고, 부모님의 손을 잡아 줄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이 관계를 끝내겠다.'


공황발작이 찾아온 날은 그날이었다. 이혼을 선포해도 내가 할 줄 알았는데, 남편이 이혼을 선언한 그날.

그날이 내 첫 번째 공황발작의 시작이었다.


< 다음 글 이어가기>  

    


<에필로그>

'친구야, 너의 시간이 이렇게 선샤인 했으면 좋겠어. 네 마음에도 꽃이 피길...'

매일매일 울고 있는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보내온 사진입니다.

오늘도 내 삶의 어디부터 잘 못된 것일까 고민하면서 브런치에 글을 적어봅니다. 지난 시간에 대한 기록.

지리지리 하고, 바보 같은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글.

하지만 저는 내 이야기의 끝이 비참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친구가 보내온 사진처럼 제 삶에도 꽃이 피고 햇살이 가득 비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혹시 시댁에 대한 비난이 될까 글 쓰는 게 두렵지만, 시댁의 이야기가 아닌, 남편의 이야기가 아닌

그냥 제 삶의 이야기니까.. 계속 기록해 볼까 합니다.

왜냐면 저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 치유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는 이 깊은 절망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고민하며

제 삶의 선샤인을 꿈꿉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감당해 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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