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이름은 미카야!
앱을 설치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순수한 목적으로 한국에서 친구를 만들고 싶은 외국인'을 마주하다니, 내가 찾던 것이 바로 그런 친구였지만 믿기지 않았다. 이게 바로 현실일까 싶어 이마에 스스로 딱밤을 때려본다.
'아야. 이마도 손가락도 아파.'
응, 현실이구나. 하지만 연애할 사람은 아니니 괜히 두근거리진 말자. 단지 남자친구의 영어 선생님일 뿐이야. 약간의 노력만 했을 뿐인데 얼떨결에 예의 바른 외국인 친구를 하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좋은 기회다, 내 영어 스피킹에도 도움이 되겠지?
Now
이제까지 토종 한국인인 나의 연애 철칙 중 하나는 '외국인은 절대로 연애 대상이 아니다'였다. 이전에 만났던 외국인 남자친구들과는 이런저런 문제들(언어, 문화와 사고방식, 식성 차이로 뭉뚱그릴 수 있겠다)로 그리 오랜 시간 연애를 지속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길어봤자 몇 달 가는 게 고작이었다. 아무래도 식성과 문화가 비슷한 한국인이 아니라면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지 않았다. 이제까지 한국인 남자친구들과의 연애는 짧으면 1년 반, 길면 7년까지 만나온 적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 '친구'는 있어도 '애인'은 없다는 것이 내 정론이었다. 그러니 내가 그때 당시 지금의 남편에게 연심을 품을 여유는 없었다. 남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차피 너도 똑같이 눈 새파란 외국인이었잖아. 어떻게 내가 너를 연애 대상으로 볼 수 있었겠니?
그리고 T 앱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뻔하지만 첫인사는 "Hey, nice to meet you :)." 그 뻔하디 뻔한 한 마디로 나는 드디어 이 미지의 외국인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물었다. 그의 이름은 Zach, 나는 내 이름의 줄임말인 Mika로 나를 소개했다. 우선, 내 T 앱 프로필에 적혀있듯 남자친구의 존재는 분명했기에 이는 확실히 해야 했고, 네가 우리들과 어울리며 영어 스피킹 물꼬를 트는 게 우선적인 내 목적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고, 음식에도 관심이 있기에 자신은 좋다고 이야기했다.
일단, 랜선 친구가 아닌 만나서 친구가 되려면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야 하고 신원이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해 첫 대화에 무례할 수 있지만 이것저것 물어봤다. 호구조사도 아니고 참, 하지만 그때는 그게 중요했던 것 같다.
첫째, 외국인은 신원이 확실하지 않기에 뭐든지 확실히 해야 한다.
둘째, 외국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인터넷에서 사람을 만나는 데 사는 위치쯤은 물어볼 수 있지.
셋째, 그냥 나는 그가 궁금하다.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에게 주입한 이유는 '셋이 만날 수 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야 만날 수 있지 않겠어라는 시답잖은 자기 합리화.
그에게서 빠르게 '경기도 동두천, 1호선 보산역 근처에 살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쩌다가 경기도 북쪽 끝자락까지 올라가서 살게 되었냐, 뭐 하고 사느냐, 하고 물어보는 나의 말에 그는 자신은 주한미군(United States Forces Korea, 약칭 USFK)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나는 또 '아, 친구는 친구지만 유통기한 있는 친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한미군은 한국에 잠깐 '주둔'하는 것뿐이기에 그리 오래 지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그가 언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지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나름대로 군대에 관해서 보통의 여성들보다는 관심이 있었기에 네 보직은 무엇이냐, 내 직업은 뭐다, 이러저러한 신변잡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리 잘 풀릴 것 같지만은 않았던 이야기가 조금씩 트이기 시작하자, T 앱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제 통성명도 했고 서로 뭐 하는 사람인지도 알았겠다, 다른 메신저 앱으로 옮겨가서 이야기를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당연하듯이 그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카카오톡을 사용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오호, 꽤 한국화가 되어있는 친구구나.
내 전화번호를 준 지 얼마 안 되어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카톡 왔숑!'
드디어 그가 나를 카카오톡 친구로 추가하고 첫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다.
"Hello!"
한 번 트이기 시작한 대화는 쉬이 이어가는 편이기에 그와 나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너를 찾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T 앱에서 친구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격인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재밌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그 앱에서 연애할 사람을 안 찾는 건 아냐, 그런데 네 프로필을 자세히 읽어봤으니까 난 너와 네 애인에게 무례하게 굴 생각이 없을 뿐이지."
아, 가슴에 무거운 돌이 하나 얹힌 기분이었다. 지금의 연애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내 주변의 친구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걸 좋은 방향으로 끌고 나가려 외국인 친구를 사귀게 해 주려는 건데. 그래, 나도 격식 차려 대해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럼, 말을 돌려 한국엔 언제 왔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럼 동두천에서 얼마나 지낸 거야? 나도 대학 다니기 전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외국인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주한미군도 있었어. 물론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지만, 한국에 정착하기보다는 다들 떠나기 마련이더라고."
그는 지난 2021년 2월에 한국에 처음 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놈의 COVID-19 때문에 군부대 내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최근에서야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T 앱을 설치했던 거라고 한다. 다들 매칭이 되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거나, 대화를 몇 번 하다가 끊기가 일쑤인데 이렇게 이어져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다음 주에 미국 본토로 한 달간 다녀온다고 한다.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일정까지 알려주다니. 꽤나 솔직한 친구다.
"그래, 그럼 이번 주말에 만나는 건 어때? 내가 프로필에도 적었듯이 내 남자친구와 나, 너 이렇게 셋이서 어울려 놀면 좋겠어. 뭘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기간에 살바도르 달리 전시회가 있는데, 관심이 있으면 같이 가지 않을래?"
의외로 그는 전시회를 좋아한다고 했다. 군인이라고 해서 감성적인 걸 좋아하지는 않겠구나 하고 단정지은 내가 괜히 무안했다. 그럼 전시회에 더해서, 한국 음식도 먹고 술도 마시고 이것저것 하자는 간략한 계획을 세우고 우리는 처음 알게 된 그 주말에 처음 만나기로 했다. 1호선 저 끝에서 서울 중앙 동대문까지, 길지 않은 여정일 텐데 흔쾌히 내려오겠다는 그의 말에 그저 고맙기만 했다. 약속을 잡은 이후로도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좋아하는 음악, 취미, 그리고 좋아하는 주종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저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면 어색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Now
돌이켜보면 우리는 면대 면으로 처음 만나기 이전에 며칠밖에 여유가 없었는데도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눴다. 단순한 취미 이야기부터, 상세하게 그가 좋아하는 실탄사격 이야기(본토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리볼버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최근에 술을 끊었다는 이야기, 서로 어떤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는지, 자기가 군대에서 보내는 일상은 어떤지, 나의 마케팅 회사 일은 어떤지. 점점 친구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레드와인은 세미스위트라는 걸 처음 알게 됐었지. 그리고 자긴 제주도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들었다며, 한국에 있는 동안 꼭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그때 나눴다. 우린 연애를 시작하고 백일 즘 지나 제주도에 함께 여행을 갔으니 그 바람은 결국 이루어졌다. 그 당시 남편을 처음 만나 어색할 것 같다는 걱정은 사실 기우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
It meant to be like this between you and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