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구이를 잘 먹는 너
호텔 방으로 아침 햇살이 조금씩 들어와 눈이 뜨인다. 머리는 죽을 만큼 아프다. 역시 어제 술을 너무 마신 거겠지. 그러다가 어제 나 혼자 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서 깜짝 놀라 내 옷차림을 쳐다본다. 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어제 만취한 상태로 Zach의 부축을 받아 호텔 방으로 들어왔을 테다. 영화를 보다 잠들자고 이야기한 기억은 어렴풋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아 조바심이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았다. 옆 침대에는 그가 깊은 잠에 푹 빠져 있었다. 깨워야 할지 말지도 고민이 되어 한두 시간 핸드폰을 만지며 절친과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는 집에 들어갔다고, 혹시 오늘 또 같이 놀려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여 Zach는 좋은 사람이라고 첨언해 준다. 하지만 연애는 이제 지쳤는 걸.
핸드폰을 조몰락거리는 사이에 옆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당연히 Zach겠지. 어색한 기운이 감돌지만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깨 보려고 잘 잤냐고 물어보는 말에, 평소에 푹 못 자는데 덕분에 잘 잤다고 얘기한다. 장난기는 어딜 가지를 않는지, '너 자기 전에 영화 한 편 보자고 해놓고 5분 만에 코를 골더라.'라는 말에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쁜 인상을 준 건 아니겠지 싶은 마음에 안도의 한숨도 내쉰다.
그래서 오늘은 무얼 할 거냐 물어보는 그에게, 친구가 이곳 근처로 오기로 했으니 점심을 먹고 노래방이나 가자고 했다. 아마 한국 노래방이 생소한 그에게는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대충 세수만 하고, 친구와 만나 부대찌개를 먹으러 갔다. 그는 처음 보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잘 먹는다. 외국인 친구가 밑반찬까지 골고루 먹을 정도로 음식을 가리지 않는 건 처음인데, 그저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노래방에 가서는 친구와 나만 실컷 노래를 불렀다. 의외로 부끄럼을 많이 타는 그는 노래방 책을 한참 쳐다보기만 하더니 노래를 한 곡도 부르지 않았다.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저녁 무렵이 되어,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다. 실연의 아픔도 반쯤은 씻겨 내려간 듯했고, 좋은 친구를 얻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Zach와는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기분이라 즐거웠다. 같이 잠들었는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어쩌면 놀랐을지 모른다. 외국 남자에 대한 선입견일까,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원나잇을 하고는 한다던데,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역시,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무리 상처를 받더라도 강아지처럼 또다시 사람이 좋아지는구나 싶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그저 하염없이 이제는 어떻게 살아갈까, 다시 상처받기는 싫은데, 여러 생각이 오간다.
Now
둔한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연애를 할까 의구심이 들었다. 내게 감정이 싹튼다 해도 남편은 내게 전혀 이성친구로서의 감정이 들지 않았다고 혼자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 이전부터 조금씩 내게 마음이 있었는데 애인이 있는 내게 표현하지 못했고, 처음 같이 잠든 날에도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너무나도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사랑스럽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평일은 업무 일과로 시간이 지나게 마련이다. 그러다 갑자기 Zach에게 연락이 왔다. 네 전 남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고, '미카를 잘 부탁한다'라는 틀에 박힌 문자를 자신에게 보내더니, 자신이 자해한 사진을 그에게 보냈다고 한다. 지나간 사람이라 다시 붙잡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사람이 죽는 것은 막고 싶었기에 당장 그에게 내가 네가 있는 곳으로 갈 테니 만나서 이야길 하자고 했다.
그는 처음 방문하는 미군 부대에 어색해하는 나를 데리고 일단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까지 전 남자친구가 보낸 문자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미카를 사랑할 자격이 없어', '그러니 네가 이제 미카를 지켜줘', '미카를 잘 부탁해', '나 락스를 마셨어', 그저 조소만 나온다. 지하철을 타고 동두천으로 올라오는 사이 바로 112에 전화해 전 남자친구가 자살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렸고, 경찰은 내게 CCTV로 그 남자가 서울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는 모습을 목격했고 혈흔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아, 또 이런 장난이구나. 나와 교제하는 도중에도 그는 종종 한강 근처로 가서 자살하겠다며 위치를 보내곤 했다. 그럼 나는 또 한강 근처의 지구대에 가서 그를 달래 데려오곤 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 한강에 빠져 죽겠다는 난리를 치고 내가 데리러 가야 하는 상황이 오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한 모습인 Zach에게, 그 사람에게 이러한 전력이 있으며 아마 또 자살로 나와의 관계를 되돌리자 협박하려는 구실이 뻔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뜻을 전했다. 학부에서 심리학 계열 전공을 하고 있는 그는, 안 그래도 내 전 애인이 정신적으로 불안하다고 생각했다고 이제야 말해 미안하다고 한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겠어. 식사를 허둥지둥 마치고 재택으로 업무를 끝낸 뒤 그와 생각 정리를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웠다. 이런 스토킹 범죄는 내가 피해받을 수 있는 일이기에 절대 그 사람이 연락해서 오라고 하더라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최대한 피하고, 어쩔 수 없이 받게 된다 하더라도 강경하게 대하기. 그는 물론이고 아까 전화를 했던 경찰조차 그 남자가 서울에 왔다고 하니 내 집에도 들를 가능성이 있어 오늘 밤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전화가 수없이 걸려온다. 부재중 전화가 자그마치 수십 통. 이제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 시작했다. 한강이라고, 자기는 뛰어내릴 거라며 내심 자기를 데리러 와주길 바라는 말을 하는 그 사람에게 이제는 일말의 감정조차 남지 않아 그저 징그럽기만 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추할 수 있을까. 복합적인 감정이 빠르게 내 머릿속을 차지하는 걸 주체할 수 없어 나는 눈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내게는 이제 믿음직하다고 생각되는 Zach에게 안겨 울음을 쏟아냈다. 한참 울다 지친 나를 그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토닥여 쪽잠을 재워주었다. 달콤한 낮잠이었지만,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야길 나누고 억지로 저녁을 목구멍에 넣고서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자 더욱 불안해졌다. 그 인간이 찾아올 수 있어 집으로 바로 갈 수는 없으니 친구에게 연락을 해 친구 집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친구도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럴 줄 알았다며, 상황이 괜찮아지고 경찰에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그 집에 묵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내가 친구를 막 만난 시간에 그 사람은 내게 폭탄 같은 문자를 퍼부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낮에 전화했던 경찰에게 다시 연락했다.
'나로부터 보호해 줄 다른 사람 찾았니?'
'전화 안 받으면 우리 끝인 거 알지'
'넌 근데 상관없나 봐'
'너 나 또 신고했구나'
'대단하다 진짜'
'결국 이거야?'
'내가 너한테 이 정도인 거야?'
'지금 전화 안 받으면 우리 평생 안 보는 걸로 알아'
'네가 언제는 내 말 들었겠냐만은 앞으로 후회한다는 얘기 쥐뿔도 꺼내지 마'
'역겹다 진짜'
나는 그저 아무런 말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경찰'이라는 한 단어를 문자로 보낸 뒤 그 인간을 차단했다. 새벽 사이에 부모를 동반하고 우리 집에 찾아온 모양인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참 울렸지만, 친구가 내 전화기를 보여주지 않으며 내일 아침에 당장 경찰서부터 찾아가라고 했다. 잠이 오지 않지만 수면제를 먹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복잡한 걸까 후회만 드는 날이었다.
Now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일은 끔찍하다. 다만 내가 그때 마음을 비우고 애초에 무시했으면 더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날 당장 경찰서에 찾아갔더라면 조치가 더 빨랐을 텐데,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남편을 만나서 그런 행동을 한 내가 미련스럽다. 남편도 내 행동이 미덥지만은 않았지만 우선 신변이 걱정되고 나 또한 진정시켜줘야 하는 상태였기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저 남자는 우리 엄마에게도 미친 듯이 전화를 하고 엄마가 쓰러지는 상태까지 가게 만들었지. 지금 엄마는 우리 남편이 너무 예쁘고, 내가 행복한 게 너무 고맙다며 사위를 그렇게 예뻐할 수가 없다. 내가 질투가 날 지경이다. 남편도 그때는 그저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행운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반차를 내고 경찰서에 찾아가 스토킹 범죄자 피해 조치를 마쳤다.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았고, 곧 집에 CCTV 또한 설치될 거라고 한다. 이 상황을 친구에게 전하자 친구는 마지막으로 담판을 짓고 싶으면 전화로 하고, 그 내용을 확실히 녹음하고, 집에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일 테니 옆에 있을 거라 걱정 말라고 한다. 마침 금요일이라 Zach도 불렀으니 전화가 끝나면 둘이 이야기하면서 좀 마음 가라앉히라고.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었다는 것 또한 내게 행운이다.
드디어 담판의 시간이 되어 확실히 내 상황을 전하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전화를 받지 못하고 뛰쳐나간 전 남자친구를 대신해 그 사람의 아버지가 전화를 건네받는다. '가정폭력이 있어도 사실혼 관계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신고를 할 수가 있냐', 그 말에 화가 나 '당신은 그럼 당신 와이프도 때리고 사시는 겁니까?'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이런 집안과 엮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쩌면 Zach와 만나게 된 것은 신이 내려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전화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났다며 셋이서 닭발을 시켜 먹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다니, 정말 다행이다. 늘 거리가 있더라도 곁에 있어준 친구에게, 일하느라 바쁠 텐데 하루종일 내 불평불만을 들어주었던 Zach에게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토요일, 드디어 아침이 밝아왔다. 우리는 아무런 일정도 정하지 않은 상태로 무얼 할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Zach는 내게 어떤 걸 하면 기분이 좀 풀리겠냐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했다. 고민 없이 '실탄사격'이라고 말했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면 실탄사격장으로 달려가 총을 쏘곤 했다. 내게는 술보다는 권총 쏘는 그 반동과 쾌감이 스트레스 해소제였다. 그는 자기도 한국에 와서는 한 번도 권총을 쏴 본 적이 없으니 자기도 좋다며 그럼 점심을 먹고 총을 쏘러 가자고 했다.
점심으로 먹은 메뉴는 단골 약국 옆에 있던 생선구이집. 시도해 보지 않았던 음식이라길래 고등어구이와 청국장 정식을 먹었는데, 그는 고등어구이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며 엄청 좋아했다. 청국장도 한국인은 못 먹는 사람이 있을 정도인데, 맛있게 뚝배기를 싹싹 비우는 모습을 보는 내 얼굴에 미소가 스몄다. 사격장으로 향하기 전에 식사한 게 소화될 겸 유행하던 네 컷 사진도 찍고, 아트박스에 들러 재밌는 물건들도 구경했다. 많고 많은 물건 중에서 Zach는 내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다며 화난 오징어(뒤집으면 웃는 오징어가 되는 인형) 인형을 사주더니 내 머리에 얹어주었다. 뭉클하고 따스한 느낌이 올라왔다.
그리고 우리는 사격장으로 향해 신나게 총을 쐈다. 그의 말로는 가격도 꽤 나쁘지 않다고 한다. 25발을 쐈는데 한 번은 내가 이기고, 한 번은 그가 이겼다. 의외로 총을 잘 쏘는 나를 보며 그의 호감도가 조금 더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사격을 다 끝내자 이젠 뭐 할까? 하고 묻는 그에게 너 부대에 안 돌아가도 되냐고 묻자 그는 내 마음이 좀 더 안정될 때까지 일요일까지는 뭐라도 재밌는 걸 하면서 자신이랑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안 그래도 우울하고 무서운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느니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일요일이니 단 둘이서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면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면 좋겠다 싶어 학창 시절 자주 들르던 수제맥주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들, Zach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이야기들을 서로 풀어놓으며 우리는 마음의 거리를 조금 더 좁힐 수 있었다. 하지만 맥주는 그렇게 쉽게 취하지 않는 주종이라 그렇게 알딸딸하지는 않았고, 조금 더 작은 공간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고즈넉한 동네 단골 와인바에 갈까 고민을 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는 '다른 데로 가고 싶어? 가고 싶은 데로 가자.'라고 흔쾌히 말해준다. 우리는 남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와인바로 향했다.
Now
'둘은 어떻게 사귀게 됐나요?'하고 물어보면 사귀기 전에 했었던 실탄사격장 데이트를 언급하며 종종 이야길 꺼내곤 한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 고른 데이트 코스 아니었나 싶다. 그때는 데이트가 아니라 그냥 내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갔었지만, 돌아보면 그것도 애인이라는 관계정립을 하기 전의 친구로서의 데이트였으니까. 여담으로 남편은 그 이후로 고등어구이를 참 좋아하게 되었다. 요즘도 가끔 함께 장을 보러 가서 고등어가 있으면 구워 먹자고 종종 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