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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키 Dec 16. 2021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철학은 각성제다. 처방전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아이를 키우면서 철학이나 종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아이가 던지는 끝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보다  많이 생각한 철학자들, 혹은 절대 진리를 가지고 있을 (내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절대 진리를 해석하는 신학자)에게 의탁하고 싶었다.

날라리 기독교인이고, 일단 아이도 매주 설교는 듣고 있으니 다른 수단으로 몇 권의 철학책을 들춰보았는데, 주로 철학사조, 역사들을 다루고 있어서 바로 내려놓았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루소처럼 걷는 법, 간디처럼 싸우는 법... 등 철학자들이 문제와 삶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소개한다. 읽으면서 나는 종종 주변을 떠올렸다.
가끔 멈춰서 서있곤 했다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에릭 와이너가 "멈춤은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쓴 글은 요즘 자주 듣는 곡 Anthony Ramos의 <Stop>을 떠올리게 했다. 잔나비 <wish>도 "하늘을 봐요. 온세상이 멈출 거예요." 라고 노래했고.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도 있지 않았나? 소로의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얼마 전 읽은 [고사리 가방]에서 고사리를 캐던 제주 어머니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이펜이 것도 저펜이 강 사야 봐진다(이쪽것도 저쪽에 가서 서야 볼 수 있다.).", 세이 쇼나곤의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는 내 브런치 작가 소개 "미끄러지는 순간을 잡고 싶다."와 살짝 닿는다.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에서 소개된 스토아 철학의 핵심 교리인 "바꿀 수 있는 건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건 받아들여라."는 일년 전 샤시 교체를 하며 뼈저리게 느꼈던 어른됨의 연습 아니었던가. 공감가는 게 많아질수록 궁금해졌다.

평상시에도 책 제목, 노래 가사, 친구들과의 대화 등에서 얻을 수 있는 구절인데 더 무게감을 갖는 건 무엇일까? 그 구절이 치밀한 논리 끝에 전개되어서일까?,"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120p)의 반대로, 이 철학자들은 오래오래, 아주 오랜 시간 들여다봄으로써 이러한 관점을 세웠기 때문일까?  그들의 저서를 직접 읽진 않았기 때문에 위 가설에 대해선 답을 못하겠다. 다만,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는 중에 한 분이 그러셨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네, 이런 지향점이 맞구나 하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고. "노래가사, 책 제목 등에서도 흔히 발견되는데 철학자에게서 위안을 받게 되는 건 권위 때문일까요?"하는 나의 질문에 "권위에 의탁하는 경우도 있다."와 "보편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라는 답을 하셨다. 또다른 독서모임 회원인 친구는 "눈에 안 좋으니 스마트폰을 많이 보지 말라는 말은 친구도, 남편도 하지만 권위자이자 전문가인 의사한테 들으니 더 와닿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네. 권위다. 권위는 중요한 것이다. 역사와 수많은 이들을 거쳐 검증된 철학자의 말이니, 보편 법칙임에 타당할 것이다. 이 책의 독서모임을 통해 새기게 된 정의는 이것이다. "권위는 중요하다." (물론 누가 어떻게 부여한 권위인지는 따져야 한다.)

 권위는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권위자들이 말하는 삶을 바라보는 방법 중, 내가 취할 수 있고, 내게 잘 맞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은 비교적 쉽게 내 삶에 적용하고, 강점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워낙 질문은 많지만 소크라테스처럼 질문하려면 더 노력해야 할 것 같고, 에피쿠로스처럼 평정을 추구하는 것도 내겐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는 말은 행동에 잘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릇장의 예쁜 주전자와 잔을 자주 꺼내는 식으로 말이지.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은 말 많은 아들을 위해 잘 장착해 두어야 할 것 같고. "누구에게도 성질을 내지 말 것,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라는 간디의 말은 가족을 위해 되새겨야 하고.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니체를 읽어봐야겠고. 등등...
이 책은 이런 방법들로 챕터를 만듦으로써 철학의 사용법, 그리고 정의까지 알려주는 것 같다.
나는 철학 속에 답이 있다 생각했지만, 철학은 수단이고, 방법일 뿐이라는 것.
76p에서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떄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걸 '삶 속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바꿀 수 있겠다. "해답은 부산물이다. 해답은 관점과 생각을 견지할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라고. 그러니 아이가 나에게 질문할 때, 나는 답을 하지 말고, 함께 생각하고 질문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월든]은 각성제로 쓰인 것이지 처방전은 아니었다."(p132)라고 에릭 와이너는 말했다.

내게 있어 철학이 이처럼 다가왔다. "철학은 각성제다. 처방전이 아니다."라고.
  

 철학은 각성제이다. 처방전이 아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 배우자나 통신사를 고를 때처럼 열정적이고 신중하게 철학 학파를 골랐다고 한다.(195p) "자기 성격을, 자기 운명을 형성할 일생일대의 선택을 내리는 것이었다."라고. 지금도 이게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종교가 힘을 잃고, 각자의 개성이 중시되는 헬레니즘의 재림 시대에 하나씩 가훈처럼 써놓고 (헬레니즘 시대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흔한 가훈처럼 철학으로 모양만 낸 집도 대다수이지 않을까 ㅎㅎ) 나를 파악하고,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파악해 두는 것. 피터 비에리는 [교양이란 무엇인가]에서 "교양인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만의 방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에 실로 여러가지 가능한 길이 있다는 것을 폭넓게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라고도.  "자신이 속한 문화적 정체성과 도덕적 정체성이 가진 역사적 우연성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오래전 주워 들은 조각난 말과 생각의 찌꺼기들을 만날 되풀이하는 이들에 비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교양인이라고 했다.
철학은 이러한 교양인이 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보편 법칙에 타당한 철학자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기 삶에 철학이 있을 수 있겠지. 그건 매번 바뀔 수도 있겠고. 그 변화까지 포함해 나와 세상을 잘 알기 위해 이 책이 말하는 '방법'들은 계속 필요할 것 같다.

+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답이 아닌 질문을 해 보았다.
"학원을 왜 다녀야 해요?"에 "학원이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대화는 그걸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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