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러시아 혁명을 돌아봐야 할 이유; 러시아 혁명 100주년의 끝에서
#35 우리가 러시아 혁명을 돌아봐야 할 이유:
박노자 저, 『러시아 혁명사 강의』를 읽고
한편 레닌은 1917년 12월 20일 체카Cheka라는 비밀경찰 조직을 창설합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날을 기점으로 혁명은 매장되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p.67).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든 거대한 사건이었다. 매장된 혁명은 어떤 미래를 그렸을까. 그 혁명이 그린 미래와 같은 현재에 우리는 도달해 있는 것일까. 혁명이 발발한지 100년, 한 세기에 걸친 시간 동안 러시아는 그리고 세상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이제 2018년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관련한 여러 저작들이 나와 있는 가운데, 소련인으로 태어나 러시아인으로 살다 한국에 귀화한 역사학자 박노자 교수 또한 그간 자신이 해온 강의를 근간으로 『러시아 혁명사 강의』(나무연필, 2017)를 펴냈다. 그 이력 때문에라도 한번 펼쳐봄직한 이 책에서 저자는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의 인물을 중심으로 1917년 이후의 러시아와 주변 세계들을 다루며 러시아 혁명의 의의와 한계, 명과 암을 두루 살핀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러시아 혁명을 왜 돌아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풀어놓는다.
제목이 그런 오해를 부추길 수도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러시아 혁명사를 순차적으로 기록한 책이 아니다. 일어난 사건들을 통사적으로 보여주는 일에 저자는 관심이 없다. 외려 부제로 붙은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라는 말이 이 책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횡행하는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현재의 연장선상이 아닌 ‘다른’ 미래를 꿈꿔야 할 이유는 이미 차고도 넘친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야 할까. 이념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은 하나였던 나라를 둘로 갈라놓았다. 여전히 분단국가라는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자본주의가 낳은 양극화의 암담한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른 미래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저자는 반면교사로서의 러시아 혁명을 말한다. 자본주의라는 차디찬 괴물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기 위해, 그 반대 지점에 불을 지폈던 러시아 혁명을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이념적 대결 구도를 만든 시발점이다. 그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인물들, 그리고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나선 각국의 정당들이 사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어떤 성공과 실패를 했는지에 주목한다. 계급 불평등으로부터 인민을 해방한다는 정신은 옳았으나 그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들이 모두 옳지는 않았다. 민주주의를 간과한 사회주의 혁명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다행히도 우리는 이미 발생한 지난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전철을 밟지 않을 계기를 가졌다. 저자는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의 정치 지도자들이 보인 행보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박정희, 이명박 등의 인물이 보인 행보를 때때로 겹쳐보기도 하고, 각국의 좌파 정당들이 보인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과거의 실패를 알아야 그것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비로소 과거와는 다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책은 거듭 말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분명 반가운 저작이다. 세뇌적 반공, 멸공 교육이 오랜 기간 정식 교육 과정 속에 존재했고, 6·25 이후 태어난 한국인의 대다수는 사회주의가 뭔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그것을 적대시하고 터부시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 속에 성장했다. 공산주의가 뭔지 알기도 전에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반공 포스터를 그렸고, 공산당은 모조리 머리에 뿔 달린 새빨간 괴물인 줄로만 알며 자랐다. ‘종북’, ‘빨갱이’, ‘홍어’ 같은 신조어가 계속 등장하며 뿌리 깊은 레드 콤플렉스를 여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모르고 하는 비난만 넘쳐나는 가운데서, 최소한 알고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읽어볼 만하다. 역사적으로 차례차례 짚어주지 않고 있다고 해도, 이 책은 비교적 쉬운 언어로 러시아 혁명에 대해 무지한 사람에게도 읽기 어렵지 않게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를, 사회주의 사상과 그 실현에 있어서의 한계를 풀어내고 있다.
물론 아쉬운 지점도 없지 않다. 절대 다수이되 그 모두가 개인으로 존재하는 민중은 보통 대의 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지난 2016년 겨울의 촛불 혁명처럼 직접적으로 개인이 정치 행동에 나서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나 결코 일상적일 수 없다. 정당 세력이 아닌 민중이 중심이 되어 만드는 비시장적 사회 같은 저자의 바람은 그래서 학자적 고민이 다소 부족한 제언으로 들린다. 또한 독도 문제나 병역 문제를 두고 저자는 민노당의 행태를 비판하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이와 더불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그대로 수긍하기에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2017년이 이제 단 사흘 남았다. 작은 아쉬움과 큰 마음 속의 파장을 선물한 이 책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에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건 사소하고도 커다란 기쁨이었다. 저자는 일용할 빵을 구하기는 곤궁했어도 누구나 문화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았던 소련 시절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가. 호화로운 이미지가 가득한 인스타그램과 극기의 검약을 강조하는〈김생민의 영수증〉같은 프로그램이 동시에 각광받는 지금 이 시대의 모순을 보라. 부유층의 과시적 과소비는 넘쳐나지만, 거기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대다수는 소비의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며 산다. 양극화가 갈수록 극심해져 간다.
우리의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경쟁과 소비심리에 매몰되어 우리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지점을 이제는 들여다보아야 한다. 지난 14일,『21세기 자본론』으로 세계를 강타한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를 필두로 세계 70여 개국 학자 100여 명이〈2018년 세계 불평등 보고서〉를 발표했다. 피케티 교수는 "갈수록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극단적 수준'에 이르렀다"며 "이대로 가다간 파국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우리의 기준은 어떤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은 부채 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 급여가 500만 원 이상이며, 2000cc 이상 급의 중형차를 보유하고, 예금액의 잔고가 1억 원 이상에, 1년에 한 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반면 프랑스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은 이렇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구사할 줄 알며,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으며, 타인을 근사하게 대접할 수 있는 요리 실력을 갖추고, 공적인 분노에 의연히 참여하며, 약자를 돕고 꾸준한 봉사활동을 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성숙한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민영화의 물살을 겪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소련 시절은 때로 아련한 향수다. 사적 소비는 억제되었을지 몰라도 세계적 수준의 문화 공연은 무료로 즐길 수 있었던 , 오페라며 발레 극장이 사람들로 가득하고, 문학을 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정부가 재정적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마을과 거리에서 서로 자유롭게 노래와 춤과 시를 나누곤 했던. 우리는 너무나도 저항 없이 자본주의적으로만 살아오고 있지 않았을까. 자본주의적 두뇌로만 숨쉬어온 우리에게 이 책은 우리가 귀 기울여보지 않았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다가올 미래는 이대로 가다간 만나게 될 미래와 반드시 달라야만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