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햄넷>에서 떠오른 질문들,
앤 (아그네스) 해서웨이를 연기한 아일랜드의 배우 제시 버클리에게 아카데미 주연상을 선사한 영화 <햄넷>, 상연하는 극장이 몇 곳 없어서 선택의 여지없이 일요일 이른 아침 투덜거리며 극장을 찾았다가, 가슴 가득히 먹먹해지는 여운을 품에 안고 나오게 만들었던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을 연이어 곱씹던 중에, 우리가 흔히 '천재'라는 단어로 규정짓고 있던 이들에 관한 선입견을 하나 깰 수 있었습니다.
영화 <햄넷>의 백미는 단연 아들을 잃은 부부가 그 거대한 슬픔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흑사병으로 떠나보낸 아들 '햄넷'을 향한 두 부부의 고통과 슬픔이 무대 위에서 왕자 '햄릿'으로 부활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셰익스피어 혼자만의 고통이 남겨지지 않습니다. 배우들의 몸짓과 대사가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그리고 그 장소에 함께 한 모든 이들이 공유한 그 감정의 메아리가 다시 앤에게 전달되는 순간, 자식을 잃은 한 부부의 슬픔은 세기를 뛰어넘는 예술로 승화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정말 그 완벽한 대사들을 혼자 골방에서 써 내려갔을까?" 리서치 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그의 연극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일부 출판업자들이 공연이 끝난 뒤 주연 배우들을 매수해 대사를 받아적게 하거나, 또는 관객석에서 공연되는 대사를 받아 적은 '해적판(Bad Quartos)'을 펴냈을 수도 있다는 주장들입니다.
현대에 출판된 다양한 셰익스피어의 책들에서도 판본별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당시의 이런 관행들(Bad Quartos)이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는 학자들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무리 셰익스피어의 인기가 좋았더라도 그토록 많은 서로 다른 버전의 해적판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일부 학자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는 결코 '결정판'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처음에 시도한 대사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뱉어내는 실수의 변주를 즐겼으며, 그 각각에 대한 관객의 야유나 환호를 통해 대사를 새롭게 다음고 깎아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천재성은 단지 세기를 뛰어넘는 창의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연극이 공연되는 생생한 현장에서, 수 많은 타자들과 끝없이 소통하며 작품을 끊임없이 진화시키고자 한 그의 '열린 태도'에도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연상이 시작됩니다. 바로 20세기 초의 위대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입니다. 보헤미아 출신의 이 천재 음악가는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거의 매일 밤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면서 여름 휴가 기간 중에만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알려집니다.
이런 말러의 현실적인 모습은 그가 좀 더 많은 곡을 작곡할 수 없는 장벽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 반대로 자신의 음악이 실제 공연장에서 어떻게 들리는 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초연이 끝난 후에 자신의 악보를 끊임없이 개정하기로 악명 높았던 말러에게 빈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국립 오페라는 마치 셰익스피어에게 '글로브 극장'이 있었던 것처럼, 큰 영감을 주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거장에게 예술은 '내 안의 것을 쏟아내는 일방적인 배설'이 아니라, 타자의 반응을 빌려, 작품이 구현되는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상호적인 관계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명의 천재들은 고독하게 작품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관객과 연주자라는 '타자'를 환대하며 작품이 스스로 자라나게 두었던 것입니다.
(이 두 명을 제가 주장한 관점에서 연결짓는 논문은 찾을 수 없었지만, 각 예술가를,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발견시켰다는 관점으로 해석한 논문은 적지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비전이 타협되는 것을 실패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 말러는 보여줍니다. 타자의 개입이야말로 내 텍스트가 생명력을 얻는 더 강력한 방법임을 말이죠. 내 주장을 지키는 것이 자존심일까요, 아니면 타자의 반응에 내 세계가 흔들리도록 허락하는 것이 진짜 용기일까요?
지금 당신이 붙들고 있는 '완벽해야만 하는 프로젝트'는 혹시 타자의 피드백을 거부한 채 혼자만의 동굴에서 다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영화 <햄넷> 속 셰익스피어처럼, 당신의 가장 아픈 상처를 타인과 공유되는 '언어'로 바꾼다면 그것은 어떤 무대 위에 세워질 수 있을까요?
[에필로그]
이번 글은 영화 한 편에서 우연히 사유의 파편을 발견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해적판과 말러의 개정 악보 사이에서 발견한 이 '예술적 소통과 겸손'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는 말러의 음악에서 발견한 새로운 연상입니다. 시끄러운 일상의 소음을 어떻게 위대한 교향곡과 오페라에 접목시킬 수 있었는지에 관해, 말러와 야나체크가 가리키는 실존적 리얼리즘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자의 생각 또는 저와 생각이 비슷한 우리들이 모여서, 일상의 다양함에 대한 다각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온라인 매거진 <폴리뷰.온라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통해 매거진에 올라온 다양한 관점들을 경험해보세요.
https://polyview.online/ko/why-need-art-ai-langu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