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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Jul 19. 2020

비제 <카르멘>


따가운 태양이 목 뒤를 찌르고, 무겁고 습한 열기가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만드는 계절이 돌아오면,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올 때가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며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을까?' 같은 의심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면, 슬슬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를 꿈꾸기 시작합니다.


코끝에 비릿한 물 내음이 언뜻 느껴지지만 곧 이를 물아내는 신선한 바람이 물기 없이 뽀송하게 우리 눈앞을 맑고 시원하게 밝혀주는 태양빛과 함께 존재를 드러내는 바로 그런.. 




현실 속에서 이런 곳들을 찾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리고 만약 찾더라도 그런 공간을 즐길 수 있는 돈과 시간의 여유가 우리에게 있을지도 확실치 않지만 우리에게는 예술이 특히나 음악이 있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이들은 우리의 무의식을 파고들며 의식의 세계마저 바꿔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밝은 태양빛 아래 투명하게 비치는 맑은 공기의 기운 하나하나를 샅샅이 눈에 들어오게 만드는 소리들, 

니체가 그토록 칭송했던 바로, 비제의 <카르멘>입니다.


  



파도처렴 유려하게 흐르는 리듬감을 타고 밀려오는 우아하고 세련된 마치 발레를 추는 듯한 템포 위로 갑작스레 펼쳐지는 야성과 본능의 비트들, 그렇게 조금씩 들춰지는 그래서 더욱더 간절해지는 관능미



수 없이 많은 유명 소프라노 또는 메조소프라노들이 부른 <카르멘>은 저에게는 위와 같은

모습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귀엽고 순진한 듯한 소녀의 모습 뒤에 숨겨진 로리타 같은 느낌으로


스탠리 큐브릭 롤리타 포스터


https://www.youtube.com/watch?v=qg88_tF733k

(테레사 베르간자)

젊은 아바도가 새롭게 해석한 <카르멘>에서 아주 여리고 상큼한 그래서 심쿵해지는 느낌을 보여 주었던

테레사 베르간자입니다. 70년대 최고의 카르멘이 아닐까요!






누군가는 백치미가 그득한 마를린 먼로의 매력을

https://www.youtube.com/watch?v=8rmSF19NfvI

(마리아 유잉)

80년대 후반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를 영화로 만들어서 대성공을 거두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오페라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카르멘>이었습니다. 쥬빈 메타가 지휘를 맡았었고, 마리아 유잉이 타이틀 롤인 카르멘을 부르고 있습니다


마리아 유잉은 이런 백치미 넘치는 이미지를 아바도가 지휘한 드뷔시의 <펠리아스와 멜리장드>에서도 잘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팜므파탈의 기운이 절절이 묻어 나오는 그로테스크함이

MARLENE DIETRICH


https://www.youtube.com/watch?v=EseMHr6VEM0

마리아 칼라스는 항상 그녀가 부른 배역의 캐릭터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노르마>의 여신에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광기를 거쳐, 팜므파탈이라는 색다른 <카르멘>까지 



그리고 누군가는 마치 60년대 Power와 Freedom을 보여주는 인더스티리얼 이미지에서 찾을 수 있는 굳건한 여성의 힘이 보이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EGHPks9u3Us

(아그네스 발차)

70년대가 테레사 베르간자였다면, 80년대에서 90년대를 휩쓴 건 바로 아그네스 발차였습니다.

당시 돈 호세 역으로 플라시도 도밍고와 양대산맥을 이루던 호세 카레라스 (이름까지 같은)와 함께 출연한 카라얀 지휘의 <카르멘> 역시 그 시대를 풍미한 명음반입니다.




(위의 비유들은 눈을 감고 각 가수들의 노래로만 느껴보세요. 

아마도 성악가들의 시각적인 이미지가 이해에 방해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여러분이라면  어떤 카르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제부터 비제 <카르멘>의 주요 부분들을, 중요한 녹음들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사건의 발단을 제시해야 하는 1막은 상당히 바쁘고 복잡합니다. 캐릭터의 성격을 제시해야 하며, 사건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단순히 카르멘과 돈 호세만 등장한다면 사건의 진행이 훨씬 심플하겠지만 여기에 미카엘라가 등장하고, 배경이 되는 담배 공장의 왁작지껄하는 분주한 분위기로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미카엘라의 소식에 어머니와 고향이 그리워진 돈 호세와 미카엘라가 부르는 2 중창 'Ma mere je la vois'

에서 호세 카레라스는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완벽한 호흡과 발성을 바탕으로 상대(미카엘라를 부르는 카티아 리차렐리)의 감수성 풍부한 음성에 완벽하게 하모나이즈 되고 있습니다.  





카라얀의 장점은 그가 음악계에서 가지고 있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동시대 최고로 인정받는 가수들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다는 점인데, <카르멘> 레코딩을 위해서도 당시 오페라 무대에서 가장 완벽하게 카르멘의 배역들을 소화하던 가수들을 캐스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휘가 모든 것을 지배하려 드는 권위주의를 드러내면서 비제의 음악이 지니고 있어야 할 밝고 가벼운 남국의 기운이 사라져 버리며, 너무 낭만적인 그리고 거대한 감정에 묻혀 버리게 됩니다. 즉 각 캐릭터가 지니고 있어야 할 무게가 오케스트라에 눌려버리게 돼버렸죠.


그의 지휘는 오케스트라의 반주 부분에서 선명하게 경계를 나누고 있는데, 과도할 정도로 힘차고 강력한 이 부분들이 아그네스 발차가 만들어 가는 강인한 카르멘의 느낌과 더불어 증폭이 되면서 비제의 음악이 가져야 할 생생함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오페라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곡들은 아마도 <하바네라> <투우사의 노래> 등 이겠지만 극의 진행에 있어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여기입니다. 


Séguedille et Duo <Près des remparts de Séville - 세빌리아의 성벽에서>


담배 공장에서 하바네라를 추며 자신에게 꽃을 던지던 카르멘의 시선에 혼란스러운 돈 호세가 고향에서 올라온 미카엘라와의 만남으로 다시 고향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정화되려는 순간, 싸움을 벌이고 붙잡혀 포박당한 카르멘이 던지는 유혹의 메시지에 넘어가고, 바로 그렇게 사랑의 포로가 된 돈 호세는 끝내 그녀를 잊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로 넘어가게 됩니다.


카르멘과 돈 호세 사이의 관계가 음악적으로 설명되는 부분이기에, 이 곡의 해석에 따라서 전체의 음악적 해석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인데요, 지휘자나 연주자들 마다 오페라를 관통하는 핵심 서사인 "왜 돈 호세는 카르멘에 대한 집착을 떨어내지 못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해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집착-


아바도판에서 테레사 베르간자는 톡톡 튀는 경쾌한 리듬감으로 돈 호세의 (그리고 듣는 우리들의) 귀에 그녀가 남긴 박자의 여운이 지속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돈 호세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그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버리는 듯싶습니다. Lolita의 이름을 발음하면,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그녀의 여운이 남겨준 입안의 감촉이 영원히 험버트의 머릿속에 각인되듯이 말입니다.




- 숭배 -


프레트르판에서 마리아 칼라스는 엄청난 포스로 니콜라이 겟다를 압도합니다. 그는(그리고 우리는) 그저 그녀를 숭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 무지 또는 순진함 - 


카라얀 판에서 호세 카레라스는 감정적 동화가 잘 되는 돈 호세를 보여줍니다. 미카엘라가 노래를 부르면 그녀의 감정에 이입되고 있고, 카르멘이 노래를 부르면 그녀의 노래에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 사랑 -


플라송 지휘의 카르멘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스타 성악가이자 부부 성악가였던 안젤라 게오르규와 로베르토 알라냐가 카르멘과 돈 호세 역을 맡고 있고, 녹음 당시까지 무대에서 한 번도 카르멘을 부르지 않았던 안젤라 게오르규가 레코딩을 통해서 처음으로 카르멘에 도전을 시작한 것 까지 말이죠.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이 음반에서는 카르멘과 돈 호세 사이에 사랑이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카르멘 명연주들이 60년대에서 80년대에 몰려 있기에, 약 20여 년 만에 등장한 주목할만한 카르멘 녹음이기도 했는데, 비제의 오페라를 부를 때 편안한 모습을 보여 주는 알라냐는 아주 서정적인 돈 호세를 보여주고 있고, 안젤라 게오르규는 어떤 역을 맡더라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부른 미카엘라는 오페라 무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1막의 이토록 다양한 복선들을 묘사하는 음악은 2막으로 가면서 좀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발전합니다.

그리고 투우사가 등장하며, 돈 호세의 사랑에 위기가 닥치게 되는데, 그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아름답고 서정적인 <꽃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k0wzci1gJw


알라냐는 실황 동영상에서 처럼 플라송 판에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서정적인 목소리를 들려주는 데 집중합니다.


그에 반해 도밍고는 아바도 판에서 끓어 넘치는 격정, 상실감 그리고 애절함 등을 표현합니다.

시기적으로 비슷한 70년대 후반 실황 영상에서도 동일한 해석을 보여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NgyhZFkgbo





카라얀 판의 호세 카레라스는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간절한 호소를 보여주는데, 마지막 절정의 순간 High B b을 완벽한 호흡을 통해 피아니시모로 불러내고 있는 점이 (실황에서 이런 테크닉이 가능하다는 게) 경이롭습니다. (상황이 좋은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훨씬 더 완벽하게 처리되고 있긴 합니다) 

실제로 이 부분을 피아니시모로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청중의 선호도와 무대에서 길고 완벽한 호흡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비제는 오페라 score상에 카레라스의 해석처럼 Pianissimo로 부르도록 지시하고 있다고 하죠.


  https://www.youtube.com/watch?v=31lUXKe_sa0


3막에서 카르멘의 집시 패거리를 따라다니는 돈 호세는 불안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카르멘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감 등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자신을 구원하러 나타난 미카엘라를 따라 고향에 돌아가지만 4막에서 다시 카르멘을 찾아 투우장에 나타나고 끝내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는 카르멘을 칼로 찔러 죽이며 비극적인 막이 내려집니다.


현대의 기준에 비춰 보더라도 상당히 개방적이며 독립적인 자유를 갈망하는 카르멘이라는 새로운 관념과 기존의 (지금까지도 자취가 남아있는) 사고가 부딪히는 지점을 색다르고 다채로운 음악을 통해 우리에게 확대경을 선사한 비제, 그가 선사해준 확대경을 통해 우리는 음악으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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