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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d River Jul 02. 2018

<판타스틱 우먼> 거울은 차별을 비추지 않는다.

이구아수 폭포의 그 경이로운 자연 경관 때문일까? 영화 속에서도 종종 이 엄청난 존재가  등장하는데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The Mission, 1986>’이 가장 대표적이다.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가 원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오보에로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를 연주하는 장면은 아직도 많은 영화 팬들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으며 노예상인이었던 ‘멘도사(로버트 드니로)’가 돌짐을 지고 절벽을 오르는 장면 역시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우선 의미의 개연성은 잠시 접어둔 채 장엄한 이구아수폭포의 광경을 시작으로 영화는 소통의 문을 연다. 곧 원색적인 조명은 폭포를 뒤로하며 사우나에서 마사지를 받는 한 남성에게 옮겨 가는데 중년의 남성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는 사랑하는 연인인 마리나(다니엘라 베가)의 생일을 축하하며 그녀와 함께 이구아수폭포를 보러 가기 위해 티켓을 구매하지만 건망증이 심한 그는 티켓을 잃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들에게 티켓을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치부되지 않는 듯하다. 이내 둘은 무대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는데 붉은 조명이 주인공 두 남녀를 비추며 카메라는 무대 전체를 보여주다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춤을 추는 오를란도와 마리나에게 점점 클로즈업 된다. 마치 세상에 그들뿐인 것 같다. 절절히 사랑하며 서로를 아끼는 그들의 감정이 느껴지는 쇼트다. 
더불어 오를란도와 마리나, 두 연인은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채워주는 관계로 볼 수 있다. 오를란도는 마리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저녁 식사를 하기 전, 그녀를 데리러 간 재즈 바에서 마리나는(그녀는 낮에는 웨이트리스 밤에는 재즈 바 가수로 일하고 있다.) 오를란도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는데 ‘어제 신문 같은 남자,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아’라는 내용의 가사다. 오를란도는 본인의 가정을 떠났다. 그곳이 분명 그의 가슴 한편에서 사랑을 떼어내 결여를 만들었으리라 또한 트랜스젠더로 살아온 마리나 역시 오를란도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이러한 그들의 공통점이 서로의 가슴속에서 빠져나간 사랑의 빈자리를 채워주기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호텔 방으로 올라간 둘은 사랑을 나눈 뒤 잠자리에 드는데 잠시 후 오를란도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결국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다 바닥에 쓰러지고 놀란 마리나가 그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하는데 그만, 오를란도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들어간 오를란도는 결국, 동맥류로 사망한다. 담당 의사는 오를란도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난 상처를 그녀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심과 두려움으로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우는데 작고 네모난 화장실의 칸막이 틈새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앞으로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마주할 고립과 고난을 미리 알려주는 것 같다. 그녀는 오를란도의 동생 가보(루이스 그네코)에게 전화로 오를란도의 죽음을 알린 뒤 긴박한 배경음악과 함께 재빠르게 병원을 빠져나가지만 결국 경찰에 붙잡혀 병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는 왜 도망쳤을까? 
     
사실 극의 초반에 그녀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긴 어렵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남성은 더 이상 ‘마리나’라는 여성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외면(현재의 모습)이 아닌 내면(과거의 모습)을 들추어내 들쑤시고 괴롭히는 건 다름 아닌 타인의 시선이다. 오를란도의 전 부인인 소니아(아린네 쿠펜하임)와 그녀의 아들인 브루노(니콜라스 사베드라)의 멸시와 모독뿐 아니라 그녀를 대하는 모든 사람의 눈빛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은 통념적인 사회 속의 무리로 이를테면, 성소수자들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이들과 그들로 구성된 사회의 비유인 것이다. 반대로 영화 속에서 거울은 아름다운 여성인 마리나, 그녀 자체만을 일관성 있게 비춰낸다. 거울은 차별을 담지 않는다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도 담지 않는다오로지 비친 대상물 자체를 가감 없이 우리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 놓을 뿐이다우리는 과연 어떤 오만으로 거울이 비쳐낸 온전한 대상물에 조소와 비난의 이견을 달 수 있단 말인가?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녀는 자신의 오페라 선생님을 만난다. 그의 말투는 다소 거칠게 그녀를 어루만지는 듯하지만 진실 된 따뜻함으로 그녀를 위로한다. 그녀 또한 그의 성정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다가가 안아준 뒤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를 싣는데 ‘멸시받는 아내, 모욕 받는 아내, 제게 무슨 잘못이 있나요’라는 내용의 가사가 그녀의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녀는 길을 걸어가다 점점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나아가지 못 한다. 그녀에게 들이닥친 일련의 사건과 칼날 같은 사람들의 멸시가 이렇듯 그녀를 그 자리에 옭아매는 것이다. 그 후 그녀의 시선은 곧바로 관객들을 향한다. 감독은 마리나의 분개한 두 눈동자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여태 그녀에게 쏟아지던 조소의 비수들이 다시 관객들에게 쏟아지며 꽤나 당황스러운 기분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감독이 교묘히 심어놓은 장치에 거의 반자동적이며 자발적인 윤리적 성찰을 하게 되고 마리나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더욱 증폭 시킨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집에 돌아온 그녀는 쓰레기가 널 부러져 온통 엉망인 집을 보며 당황하고 심지어 디아블라(오를란도가 키우던 셰퍼드)까지 사라지자 크게 분노해 가족들이 오지 마라 당부했던 오를란도의 추모식을 찾아간다. 하지만 막상 찾아간 추모식에서 역시 거센 가족들의 반발에 의해 쫓겨나고 오를란도의 아들 브루노와 일당들은 그녀를 따라가 강제로 차에 태워 얼굴에 테이프를 감은 뒤 골목길에 던져 버린다. 테이프 때문에 일그러진 마리나의 얼굴이 마치 그녀 마음의 상처를 끄집어내 대변하는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서 테이프를 걷어낸 뒤 클럽으로 향한다. 낯선 남자와 함께 춤을 추는 그녀에겐 더 이상 오를란도와 함께 춤을 췄을 때와 같이 둘 만을 비추던 따뜻한 조명은 없다. 정신없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보이는 오를란도의 모습, 그녀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간 뒤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날아올라 관객들을 바라봄으로써 또 한 번 질문을 던진다. 당신도 나를 불쌍히 여기냐고 다음 날, 마리나는 언니의 집에서 그녀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대사를 읊조린다.

죽을 만큼의 고통이 날 강하게 만든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알고 보면 그녀는 애초에 약자가 아니다. 소니아가 그녀에게 ‘역겹고 키메라 같다’고 비난할 때도 브루노가 그녀를 비참하게 할 때도 성범죄팀 여형사가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들 때 역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일련의 상황에 비해 그녀는 다소 담담하게 이겨낸다. 이를 나타내듯 마리나는 영화 속에서 길을 걸을 때 항상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며 파도 그림이 그려진 벽지에 맞서 복싱을 하는 등의 장면에서 비유된다. 어쩌면 우리가 영화를 통해 주목하고 바라봐야 할 대상은 마리나가 아니다. 그녀를 향한 어떤 연민이나 동정의 시선은 오히려 그녀 자체를 옥죄는 또 하나의 족쇄가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대로 소니아와 브루노 그리고 이 세상에 시선을 던져야 한다. 지독한 편견의 굴레에서 사회 속의 마리나 들을 떼어낼 관심의 화살은 그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서부터 비롯돼야 옳을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오를란도가 죽은 뒤, 마리나는 그의 차를 운전하다가 오를란도가 병원에 가는 도중 앉았던 조수석에서 181번 숫자가 달린 열쇠를 발견하고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가게에서 한 노신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가진 익숙한 디자인의 열쇠를 보고 노신사에게 어디서 난 것인지 묻는다. 끝내 핀란디아라는 사우나의 옷장 열쇠인 것을 알게 된 마리나는 사우나를 찾아간다. 마침내 181번 옷장 앞에선 마리나, 떨리는 마음으로 옷장을 열지만 텅 빈 어둠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그녀에게 오를란도와 관련돼 남은 것은 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열쇠의 기대감마저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오를란도의 그늘을 부여잡을 그 무엇도 그녀 곁에 남아있지 않다는 상실감이 가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녀의 발걸음을 그의 장례식장으로 옮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소니아와 브루노의 차를 막아선 마리나는 그들의 차 지붕을 타고 올라가 방방 뛰며 오를란도의 키를 던진 뒤(그들이 그녀에게서 그렇게 뺏고 싶어 하던 오를란도의 마지막 모든 걸 다 던진 셈이다.)디아블라를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이제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오를란도와 함께한 기억은 디아블라가 유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곧 마리나는 오를란도의 환영을 따라가고 붉은 조명 아래에서(둘이 함께 춤을 췄던 조명과 비슷하다.) 키스를 나눈 뒤 눈물 흘리며 그를 떠나보낸다. 슬픔을 딛고 오페라 가수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 영화는 그녀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이런 그늘 없었네, 어느 그늘보다 감미로운 그늘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감독이 처음에 삽입한 이구아수폭포에 대한 의미와 그 의도를 곱씹어 볼 수 있다. 쏟아져 내리는 이구아수폭포를 눈앞에 둔다면 어떤 존재가 자신을 위대하다 말할 수 있을까? 방대한 양의 물줄기를 토해내며 영겁의 시간을 지켜온 위엄 가득한 자연을 바라보면 그 어느 것도 존재의 우위에 있을 수 없다. 아니! 무의미하다. 존재가 존재를 탄압하고 모욕할 수 있는 권리란 애초에 주어진 적 없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이구아수폭포를 올려다보자 대자연의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서 우리는 겸손과 포용을 배워야 할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2018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의 저력은 무엇일까? 견고하고 확고한 메시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미장센이 탄탄하다. 이로써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자 하는 바를 감독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또한 <판타스틱 우먼>을 통해 <헤드윅, 2002>의 주인공 헤드윅 로빈슨이 절로 떠오른다. (단순히 두 인물 다 트랜스젠더라는 공통점 따위는 우선 제쳐두고)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그들의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불편한 현실의 조소 속에서 완강히 맞서는 그들의 태도는 관객들로 하여금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들며 다소 흐뭇함을 자아낸다. 편견에 당당히 맞서는 영화감독들의 여러 움직임과 이러한 변화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세계를 무대로 한 시상식의 조화가 사회 저변에 깔린 편견에 맞서 일대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의 동아줄을 단단히 부여잡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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