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 건 아니다. 눈을 감고 앉아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자 전신주 위 에 살포시 앉은 작은 새의 지저귀는 소리, 화통을 삶아 먹은 듯 거친 트럭의 엔진 소리, 흰 종이 위를 걸어 다니는 연필의 발자국 소리, 우리는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주목하고 또 그 형태를 유추한다. 그렇다면 보이고 들릴 때는 왜 현상들에 주목하지 못할까? 오래 보고 집중해서 들어야 비로소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가정폭력의 문제가 그렇다. 문제의 그림자는 나날이 비대해지고 목소리는 높아지지만 막상 그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김세원 대전 과학기술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해서든 가정을 유지하려는 속성 때문에 가정폭력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다. 때문에 은폐되고 사소하게 취급되기 일쑤며 그만큼 일반적인 폭력에 비해 노출이 되지 않거나 주변에 알려질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그러한 사회의 단편적인 문제를 긴장감 있는 스릴러 장르로 다룬 영화다. 두 부부는 아이의 양육권을 두고 재판을 받게 되는데 양측의 주장이 판이하게 엇갈린다. 결국 법은 아빠인 ‘앙투안(드니 메노셰)’의 손을 들어주고 그로 인해 아들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은 주말마다 ‘그 사람’(아빠)과 함께 지내야 하는 곤욕을 겪으며 아내인 ‘미리암(레아 드루케)’은 ‘그 사람’에게 가족들이 사는 거주지를 밝혀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 몰래 도망치듯 이사를 가고 이를 알게 된 앙투안은 아들인 줄리앙을 닦달해 집을 찾아내고 마는데, 가족들이 ‘그 사람’을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수록 앙투안의 집착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미리암과 줄리앙은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게 된다.
앞서 말했듯,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스릴러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영화다. 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연출이 있다. 첫째, 보이지 않는 영상 속에서 들리는 사운드(Sound)다. 오프닝과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돋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화면 속에서 우리는 소리만으로 인물의 행동에 더욱 집중하게 되며 현상을 유추하게 된다. 오프닝에서 발자국 소리만으로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늠하게 되고 방으로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짐작게 한다. 또한 딸, ‘조세핀(마틸드 오느뵈)의 임신 테스트기 사용 장면에서 역시 조세핀이 임신인지 아닌지 그녀의 작은 목소리와 반응만으로 충분히 짐작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부분은 결말에서 극대화된다. 미리암과 줄리앙만 남은 아파트에서 ‘그 사람’, 앙투안이 벨을 마구 눌러대다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둘은 더욱 긴장해서 문 바깥의 소리에 집중하게 되고 관객 또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듯 말이다. 둘째, 사운드 매치(Sound Mach)다. 자동차 경적 소리와 안전벨트 경고음 그리고 초인종 소리는 마치 아빠인 앙투안의 고함 소리로 변주된다. 거칠고 요란한 그 소리에서 가족들이 느낄 공포는 트라우마(Trauma)처럼 머릿속을 맴돌 뿐만 아니라 관객들 역시 불안감과 긴장감을 마주하게 된다. 셋째는 클로즈업(close-up)과 롱테이크(long-take)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인물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클로즈업을 주로 사용하였다. 특히 줄리앙의 표정에 포커스(Focus)를 맞추어 피해자의 감정을 오롯이 관객들에게 전달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롱테이크는 조세핀의 생일파티 장면에서 한번 사용되는데 카메라는 조세핀을 따라다니며 설정 숏(Establishing Shot)으로 파티장의 들뜨고 행복한 분위기를 전제한 뒤 조세핀이 ‘그 사람’에게 온 문자를 엄마인 미리암에게 보여주면서 이내 분위기는 반전되고, 카메라에 비치는 인물들의 분주함과 그 행동들에 따라 불안감은 더욱 고조된다. (대사가 거의 들리지 않아 관객들이 상황을 유추하게 하며 불안과 긴장감을 더한다.) 이때 역시 조세핀의 표정을 클로즈업하여 관객들이 그녀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며 서스펜스(Suspense)를 극대화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원제는 ‘Jusqu'a La Garde(보호받을 때까지)’이고 영제는 ‘Custody(양육권)’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이 세 가지 제목 모두 친절히 이 영화를 설명해주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한국어 제목인 <아직 끝나지 않았다>다가 가장 포괄적으로 이 영화를 수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첫째, 영화 속에서 아들인 줄리앙은 아빠인 앙투안을 닮고 딸인 조세핀은 엄마인 미리암을 닮는다. 줄리앙은 아빠인 앙투안의 질문에 자신이 불리한 대답 혹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을 때 입을 닫아 버리는데 앙투안 역시 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앙투안 역시 자신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닮았다.) 조세핀은 엄마인 미리암에게 하고 싶은 얘기나 해야 될 얘기를 말하지 않고 침묵한 채 꾹 눌러 담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재판이 있기 전 남편인 앙투안과 연락을 끊고 조세핀과 줄리앙을 데리고 도망갔던 것과 딸의 생일파티 중 주차장에서 당한 남편의 폭력에도 신고하지 않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사실 이 같은 행동이 이해가 되지만) 이러한 일련의 시나리오 설정이 다시 또 대물림 될 가정폭력을 전제하는 것 같아 무망한 현실을 돌이켜 보게 만든다. 둘째, 사회적 관심의 부재다. 미리암을 위협하는 앙투안을 보고도 자리를 피하며 ‘오지 말걸 그랬어’라고 말하는 시청 직원 ‘시릴 (줄리엔 루카스)’의 모습과 극의 마지막, 미리암과 줄리앙이 함께 있는 집에 침입하기 위해 총을 쏘던 앙투안이 이웃 할머니의 신고로 체포되자 종료된 상황을 조심히 지켜보던 할머니가 문을 닫고 잠그는 소리와 함께 극은 마무리되는데 마치 주변 이웃들의 관심 부재와 냉소 속에 이러한 문제들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빗댄 것처럼 보이며(관심의 부재를 문을 닫고 잠그는 것으로 비유한 것) 이를 통해 감독은 사회적 관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감독은 피해자들을 위한 법망 확대의 필요성을 제창하고 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 또, 그러기 위해 사회적 인식의 뒷받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피해자 가족들이 안심하고 스스로 문을 열고나올 수 있는 사회가 될 때까지 가정폭력이라는 무시무시한 마수(魔手)의 오만한 만행은 어딘가에서 또 꿈틀거리며 뿌리내려 현실 속, 미리암, 조세핀, 줄리앙의 몸과 마음을 좀 먹어 들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어서 얘기하자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프랑스 영화지만 한국의 실정에 비춰보기 충분하다. 당장 가정폭력에 관한 뉴스 기사만 찾아봐도 가정폭력의 실태는 무능한 법 앞에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인권재판소에서는 “가정폭력 고소에 대하여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은 점, 그리고 설령 고소가 없더라고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 대한 조사 및 처벌을 하지 않은 경우 국가의 의무 위반”이라고 판례를 통해 국가가 가정폭력 사건에 책임이 있음을 강력히 표방하고 있다. 이어서 “피해자의 신청이 없더라고 생명에 대한 실질적이고 급박한 위험에 대하여 국가가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사회에서는 가정폭력 문제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의 관리를 통감하고 있으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미비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
우리의 역할은 지속적인 관심이다. 피해자들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과 함께 목소리 내는 것이다. 이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의미가 되길 또 그런 울림을 주길 바란다.
참 고 자 료 : 굿모닝 충청/전문가 칼럼 [김세원의 복지 이야기] 법이 가정의 울타리를 넘었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