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시를 읽고 쓴다. 한낮의 열기가 땅거미의 뒤를 따라 온종일 애태우던 그 자취를 감추고, 푸른 달빛이 창가에 앉아 내 곁에 아른거릴 때면 흰 종이 위에 만물의 생기를 꾹꾹 눌러 담는다. 나의 시에는 규칙도 규정도 없다. 오로지 단어와 단어를 엮어 문장을 수놓고 숨결을 불어넣어 언어의 태동을 매만질 뿐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시라는 건 손닿을 수 없는 높은 책장에 있는 두텁고 오래된 책 한 권 같은 것일까? <죽은 시인의 사회, 1990>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일상의 손아귀에서 시의 물결을 손가락 틈새로 가벼이 흘려보내고 있다. 소위 오글거린다는 말로 비웃고 매도하거나 어렵고 고고하다는 편견들이 시의 주변을 둘러싼 울타리가 되어 접근을 어렵게 한다. 영화 <패터슨>은 시를 마주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재고하게 만드는 영화다.
<패터슨>의 얼개는 이렇다. 사랑하는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함께 사는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면서 사물을 관찰하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며 그의 비밀노트에 시를 새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를 부끄럽게 생각해 세상에 알리기를 꺼려 하고 아내는 그런 패터슨과 달리 그의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한다. 결국, 패터슨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주말에 자신의 비밀노트를 복사하기로 약속하는데, 그만 키우던 개 ‘마빈’이 그의 비밀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패터슨은 상심하여 산책을 나가는데 우연히 자신이 시를 쓴다는 일본인을 만나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곧, 헤어지며 특별한 선물을 받는다.
영화 <패터슨>의 플롯은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 패터슨의 일주일을 관객들에게 무덤덤하게 전달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탁자 위의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뒤 사랑하는 아내에게 가볍게 키스를 한다. 그 후 아침을 먹고 직장으로 향해 자신이 운전하는 버스에 앉아 비밀노트에 시를 쓰고 있으면 직장 동료 ‘도니(리즈원 맨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그는 항상 불만투성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버스를 운전하며 승객들의 대화에 살짝 웃음 짓기도 하고 창밖을 보며 시를 떠올리기도 한다. 퇴근 후에는 곧장 집으로 간다. 늘 기울어 있는 집 앞 우체통을 바로 세우고 저녁에는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 자주 가는 바에서 맥주를 마신 뒤 집으로 돌아온다.
일상이란 그렇다. 흔히 쓰는 비유처럼 잔잔한 호수 같은 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패턴을 고수한 채 시간 위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시곗바늘을 한 칸씩 옮긴다. 혹자는 그런 쳇바퀴 같은 삶을 무료해 하거나 고역스러워한다. 이해되는 사실이다. 당장 삼시 세끼 일주일을 같은 것만 먹는다고 해도 괴로운 상상이지 않은가?
하지만 패터슨의 일상은 로라의 커튼처럼 비슷한 문양과 흑백의 일정한 색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결은 제법 다르다. 그의 시선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시상을 쫓고 사랑을 노래하니 말이다. 더불어 매번 다른 승객들의 대화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술집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들이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그런 패터슨의 일상은 직장 동료인 도니와 비교되기도 한다. 패터슨의 인사와 함께 ‘괜찮아?’라는 질문에 그는 괜찮지 않은 자신의 일상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토로한다. 그리곤 되묻는다 ‘넌 괜찮아?’ 패터슨은 깊은 고민의 흔적을 드러내거나 그렇다고 으스대지 않는 적당한 시간차를 두고 덤덤한 어조로 대답한다. ‘나는 괜찮아’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패터슨처럼 산다는 건 말이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들로 막막한 하루와 꼬리 물듯 이어지는 걱정 가득한 내일이 없는 평범한 삶, 행복한 하루라는 건 삶을 너끈히 이끌 풍족한 돈이나 특별한 일이 매일 같이 기다리고 있는 삶이 아니라 불만과 걱정이 없는 삶이지 않을까? 어려운 것이다. 평범함이라는 건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물음은 ‘패터슨의 시(일상)는 어떻게 완성되는가?’이다. 사실, 이 영화의 플롯은 그의 일상을 한 편의 시로 구성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패터슨의 하루하루가 시의 ‘연’에 해당하고 그의 시선과 행동이 한 ‘행’을 쌓는다. 그리고 매 ‘행’마다 지루함을 덜어주는 ‘후렴구’가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표정 변화도 별로 없는 이 무미건조한 남자의 메마른 듯한 일상의 단음을 변주시키는 ‘시상’은 다름 아닌 아내 ‘로라’다. 로라는 패터슨의 편평한 시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싹이 돋아나게 한다. 그렇게 운율 없는 그의 시에 후렴구를 완성하는 것이다. 영화 속 신(Scene)에서 찾아보면
월요일 아침, 패터슨의 첫 연, 첫 행은 아내의 꿈 얘기로 시작된다. 그녀는 꿈에서 쌍둥이를 낳아 기르는 꿈을 꿨다고 한다. 이후 패터슨의 일주일, 그 하루하루에 매번 쌍둥이가 등장한다. 출근길에서, 버스에서, 심지어 자신에게 아름다운 시를 읽어주는 소녀까지 후렴구(쌍둥이)는 계속 그의 가시거리에서 배회한다. 어쩌면 마법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말 한마디에 마치 세뇌라도 당한 듯 그 시선에 아로새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눈앞에 아롱거린다. 그 무엇보다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사랑한다는 증거, 그 증거가 운율 없는 일상에 후렴구를 완성한다.
패터슨의 ‘시상(로라)’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심이란 펜과 지우개로 그가 걷는 일상의 모난 부분을 다듬기도 채우기도 한다. 패터슨의 시를 사랑하고 응원하며 고난으로 뒤엉켰던 그의 하루를 위로한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빈이 패터슨의 비밀노트를 처참히 찢어놓았던 시퀀스(Sequence)다. 로라는 “그러게 내가 늘 복사해놓으라고 말했잖아” 같은 소모적인 핀잔 하나 없이 그의 상실을 묵묵히 위로한다.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이다. 어찌 그런 그녀에게 시를 받치지 않을 수 있을까? 여담이지만 마빈의 질투도 이해가 된다. (마빈은 우체통을 기울여 놓고, 두 부부가 입을 맞출 때마다 낑낑거리며 질투하기도 한다. 또, 같이 산책하러 나가는 패터슨과 정반대로 걷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어떻게 완성되는 것일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낱말을 쌓고 문장을 매만지던 자신의 비밀노트가 없어져 상심하며 산책을 하던 그에게 한 일본인이 말을 걸어온다. 온갖 질문을 던지던 그 일본인은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고 말하며 노트를 한 권을 선물하더니 ‘아하!’라는 외마디의 감탄사를 툭 던져놓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패터슨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있던 펜을 꺼내어 심지를 뽑아 들고는 생각에 잠긴다.
노트에 무엇을 채워 넣느냐보다 채워 넣는 그 무엇이 중요한 게 아닐까? 그 무엇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잃지 않는 한 우린 여전히 무한히 우리 삶의 여백을 메꿔 나갈 수 있다. 패터슨에게는 로라가 그 무엇이다. 그녀가 여전히 그의 곁에 있는 한,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단어로 채워진 비밀노트든 공백과 다름없다. 영화의 마지막, 그의 시 ‘The line’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가슴에 새겨진 로라라는 한 소절 외 다른 시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패터슨은 또다시 반복되는 새로운 월요일을 맞이하겠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녀의 단잠을 헤치지 않는다. 아, 어쩌면 삶이라는 시를 완성하는 방법은 몇 마디의 굴곡과 몇 마디의 후렴과 한 마디의 사랑이다.
The line (한 소절)
흘러간 노래가 있다.
할아버지가 흥얼거리시던 노래
이런 질문이 나온다.
'아니면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같은 노래에 같은 질문이 나온다.
노새와 돼지로 단어만 바꾼
그런데 종종 내 머릿속에
맴도는 소절은 물고기 부분이다.
딱 그 한 소절만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마치 노래의 나머지는
노래 속에 없어도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