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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dy Feb 07. 2020

#003 고성과 바람과 비의 아일랜드

Gap of Dunloe 그리고 다시 Ring of Kerry

Ring of Kerry를 깔짝 둘러보고 Killarney로 돌아왔을 때 비수기 치고는 거리에 사람이 많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지 연말이기 때문에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Killarney는 관광 타운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연말 분위기를 "미치게" 즐기러 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호스텔은 아니었지만 예산을 되도록 절약하고 싶어 숙소는 주로 우리나라로 치면 관광호텔 급이나 B&B를 예약했었는데 하필 여행 첫날 묵은 호텔에서 우리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말았다. 그것도 그 호텔에 2박이나 할 예정이었는데... 


시차가 아직 덜 적응된 나와 하루 종일 운전으로 피곤한 여행 메이트는 수다고 나발이고 돌아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 잔 것 같지 않았는데 갑자기 저 벽 너머로 호탕스러운 웃음소리, 싸우는지 아닌지 판별이 힘든 고성, 심지어 가구를 옮기는 소리까지 아주 가지가지 소음이 다 들려왔다. 좀 저러다 말겠지 라고 생각하고 다시 잠에 들려고 애를 썼는데, 멈추는가 싶었던 소리들은 다시 들려왔고 이번엔 멈출 줄 몰랐다. 자다 일어난 여행 메이트는 아무래도 프런트에 항의를 해야겠다며 1층으로 내려왔고 잠시 뒤 매니저가 올라와 수습하는 듯싶었으나... 몇 분 뒤 다시 시작됐고 여행 메이트가 다시 한번 내려가 항의를 하고 나서야 수습이 됐지만 밤새 중간중간 들려오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우리는 둘 다 잠을 설쳤다. 짜증도 잘 내지 않는 여행 메이트는 제법 화가 난 목소리로 둘째 날 숙박은 손해를 보더라도 취소하겠다고 내려갔고 잠시 뒤에 전액 환불된 금액과 무료 아침 식사권을 들고 돌아왔다. 


그 호텔은 환불도 다 해주고 무료 아침 식사권을 준 데에서 사과를 마무리 지었어야 했다. 짐을 챙기고 보상으로 제공받은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는데 사과를 하겠다고 매니저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일방적으로 여행 메이트 (아일랜드인) 쪽만 쳐다보면서 어젯밤 소동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여행 메이트에게 네가 "아시안 걸"과 여행 중인데 불편한 기억을 남겨서 미안하다는 말에 나도 여행 메이트도 뚜껑이 열렸다. 어젯밤 일과  "아시안 걸"과의 상관관계는 도대체 무엇이며 사과를 하겠다는 사람이 도대체 맥락 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것이란 말인가. 여행 메이트가 조용히 분노를 억누르며 사과하는데 내 친구가 아시안인걸 굳이 언급하는 이유를 모르겠으며 그건 차별이야 라고 항의했고 매니저는 다시 사과했지만 딱히 왜 우리가 화내는지 이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그 호텔은 우리에게 불면의 밤에 짜증 나는 아침을 덤으로 안겨주고 덕분에 우리는 상당한 피로와 함께 여행의 이틀 째 여정을 시작했다.




근처의 다른 호텔을 서둘러 예약하고 Gap of Dunloe를 향해 가는데 이번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차가 제법 흔들릴 정도로 강풍이 불어댔다.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열심히 걸어 올라가는데 우리 옆으로 차가 몇 대 지나갔다. 응? 차로 갈 수 있는 데였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제법 걸어 올라왔기 때문에 주차장까지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아까워 이대로 전진하기로 했는데 갈림길 아닌 갈림길이 나타났다. 잘 포장되어 차들이 지나다니는, 우리가 걸어온 길과 작은 문이 달린 등산로. 딱히 표지판이 없었기에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이는데 여행 메이트가 저 등산로로 가면 Dunloe도 한눈에 보고 계곡에도 갈 수 있을 것이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난 그를 믿었다. 믿어야 할 근거는 충분했는데 여행 메이트는 구글 맵이나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는 나 같은 운전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정표와 방향 감각만으로 운전을 했고 그때까지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물론, 북쪽으로 갈수록 구글 맵에 물어보는 횟수는 늘어났다.) 하지만 운전하는 도로와 걸어가는 길은 다르고, 그는 Gap of Dunloe에 한 번 밖에 온 적이 없고 그마저도 아버지와 이십몇 년 전 온 게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처음엔 해가 쨍쨍한게 좋았는데... 오르다보니 날씨가 이 꼬라지였다...


아무튼 나는 여행 메이트를 철석같이 믿고 꽤나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덜렁덜렁 올라갈 때 얼마나 가파른지 사진이나 찍어둘걸... 처음엔 걸음이 빠른 여행 메이트를 쫓아가겠다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걷다 보니 사진을 못 찍고 반쯤 올랐을 땐 마주 보고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세서 사진 찍겠다고 카메라를 꺼냈다간 중심을 잃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여행 메이트 - 지금은 남자 친구인데도 - 여전히 걸음이 빨라 나한테 가끔 잔소리 폭탄을 맞는다. 죽자고 다 올라갔는데 Gap of Dunloe는커녕 올라갈 때와 다르게 잔뜩 구름 낀 하늘과 산 밑 웅덩이만 보이는 거다. 아직 여행 둘째 날이고, 우리는 아직 예의를 지키는 사이였기 때문에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물론 어금니 꽉 깨물고. 여기로 쭉 걸어가는 게 맞는 거지? 그는 자신도 불안했는지 핸드폰을 꺼내 들고 구글 맵을 체크 하더니 흔들리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기, 우리 다시 내려가야 할 것 같아... 바람에 이리저리 치여가며 올라간 데에다가 전 날 밤 제대로 자지 못한 짜증이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오며 "뭐라고 이 X자식아"가 한국어로 불쑥 튀어나올 뻔했으나 나는 아직 그에게 예의를 지키는 중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하하... 그래 뭐 여기까지 올라오니까 확 트인 전경도 보이고 좋네..."라는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다. 물론, 나는 얼굴로는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에 그는 다 내려갈 때까지 무척이나 나의 기분을 살폈다. 올라갈 땐 거센 바람에 저항하며 힘들게 올라갔는데 내려올 땐 그 바람이 되려 나를 너무 밀어대는 바람에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동년의 대한민국 여성에 비해 결코 적게 나가는 체중이 아님을 알지만 정말 문자 그대로 바람에 날아갈 뻔했다. (그리고 이후 몇 번 더 겪었다...)


날씨는 더없이 구질구질했고 엉뚱한 산을 올라갔다 온 바람에 아직 오후도 안됐는데 체력은 거의 바닥나 조금 더 걸어올라 가볼래?라는 그의 물음에 가차 없이 차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도중에 적지 않은 차들이 위로 올라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걸 보고 어쩌면 이 길을 따라 차로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오기 전 찾아본 그 어느 웹사이트에서도 Lonely Planet에서도 Gap of Dunloe에 차로 올라갈 수 있단 얘기는 하지 않아서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다들 올라가는데 우리라고 왜 못하겠냐는 심정으로 일단 운전대를 잡은 여행 메이트에게 크게 Go! 를 외쳤다.



걸어 올라가선 보지 못했지만 차 타고 들어가 겨우 본 Gap of Dunloe




힘들게 걸어 올라갔던 길을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아 차로 휙 올라가니 구름에 둘러싸인 제법 큰 호수와 계곡이 나타났다. 인터넷에서 봤던 것처럼 사방이 푸른 데다 쨍하진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뭔가 쏟아질 것 같은 Gap of Dunloe는 사실 좀 웅장했다. 마침 차도 사람도 전부 지나가 나와 여행 메이트 둘 뿐이었고,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지구가 아닌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은 기분도 살짝 들었다. 뭐랄까, 돌뿐인 행성을 열심히 헤치고 들어왔더니 그 끝에 계곡이 있었다...라는 느낌. 이때 처음으로 이 계절에 아일랜드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를 포기한 대신에 고요한 절경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든 기분이 들었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는데 탐사선을 타고 행성을 가로지르는 기분을 여기서 느꼈다


저 사진 속 저 길은 과연 보이는 것처럼 구불거리는 데다 좁기까지 한데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기 때문에 운전을 도맡아 한 여행 메이트는 매우 고군분투하였다.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이 그렇듯 그의 차도 수동식 기어였는데 그의 왼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내가 심심할까 봐 중간중간 열심히 말을 하던 그가 조용해졌으니까. 심지어 이건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에 매일 밤 머리만 대면 코를 골던 건 사실 당연했던 거다. 운전하는 여행 메이트는 좁은 길과 알 수 없는 표지판 때문에 끙끙거리는데 나는 좋다고 창문에 딱 달라붙어 저 절경을 감상했다. 아일랜드에 오기 전까지 어떤 나라인지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던 나는 막연히 가까우니 보이는 건 영국이랑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무지함에 크게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 누군가가 지나갈 수 있도록 최소한만 손을 댄, 대륙에서 똑 떨어진 섬에서 좀 더 똑 떨어진, 외진 곳의 황량함과 쓸쓸함이 느껴지는 풍경이 나는 참 좋았다. 정말 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옮겨져 있는 그 기분이 나는 너무 좋았다.



처음 생각했던 그 청초한 에메랄드빛은 아니지만 그래도 에메랄드빛....



운전대를 다시 Ring of Kerry로 돌려 바다를 끼고도는데 과연 구글이 내게 보여준 모습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가는 곳마다 바다는 얼마나 극대 노한 상태인지 (저 북쪽에 가서 저건 화난 것도 아니란 걸 알았다...) 파도는 무섭게 쳐대고 바위는 온통 어두운 색에 여기저기 삐죽삐죽 솟아 있어 딱 성질 더러울 때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윙윙 불어대는 바람 소리와 거칠게 몰아붙이는 파도 소리에 옆에서 말하는 여행 메이트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에 몸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은 세게 불었지만 나는 여기저기에서 제법 차를 세우고 한동안 바람과 파도 소리만 들었다. 바다는 화났지만 바다색은 너무 예뻤다. 날씨가 맑을 때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에메랄드빛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에메랄드빛에 화낼 때마다 하얀 거품을 뱉어내는 바다는 썩 나쁘지 않다. 아마도 여름에 왔다면 사람들의 말소리가 더 크게 들려 바람 소리도 파도 소리도 못 들었겠지.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한다. 아, 완벽한, 진짜 아일랜드의 얼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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