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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 "그들의 피가 나라를 움직였

by 밀리터리박스

1964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전투기가 이륙하고, 정글 속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던 베트남 전쟁.
그 혼돈의 전장에,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나라.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통해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나라를 바꿨습니다.
오늘은 "한국이 어떻게 베트남 전쟁 파병을 통해 경제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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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고, 전국은 여전히 폐허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산업 기반은 거의 전무했고, 대부분의 국민이 농업에 종사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수출은 연간 1억 달러가 채 되지 않았고, 국민 1인당 GNP는 약 80달러 수준으로, 전 세계 최하위권이었습니다.
지금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빈곤이었습니다.

국가는 전쟁 이후 재건에 집중했지만, 국내 자본은 부족했고 외국으로부터의 신용도 낮았습니다.
차관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개발 자금은 거의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으로 군사정부가 수립되었고, 새 정부는 ‘경제 개발’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의 자립을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지만, 당장 필요한 자본과 외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자원도 없고, 석유도 없으며, 기술도 없던 나라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해외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돌파구로 정부가 선택한 것이 바로 베트남 파병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미국과의 동맹 차원을 넘어, 국가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자 경제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외화를 벌어오면,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선동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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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동맹국들에 파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한국은 미국의 요청을 기회로 판단했습니다.
그 기회란 바로, ‘피를 흘리는 대신 외화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단순한 군사적 협력 수준이 아니라,
경제 지원을 전제로 한 전략적 파병이라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한국에 제공하게 됩니다: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에게 미국 정부가 직접 급여 지급 (당시 미화 월 200~300달러 수준)

군수물자 및 식량, 병참 장비 등을 한국 업체가 직접 납품할 수 있도록 보장

베트남 현지 미군 공사에 대해 한국 기업이 하청 우선권을 갖도록 허용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민간경제원조 확대 (기존보다 수 배 증가)

미국에서 들어오는 외화를 한국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 있도록 계좌 운영 허용

이러한 조건은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특히 외화 계좌의 직접 통제는 한국 정부가 파병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를
자국의 산업화에 직접 활용할 수 있게 한 핵심적인 장치였습니다.

이는 당시로선 다른 어떤 개발도상국도 받지 못했던 조건이며,
이러한 합의는 단순한 용병의 역할을 넘어선, 전략적 경제 파병의 모델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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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 한국은 맹호부대를 시작으로 베트남에 본격적인 병력 파병을 시작합니다.

이후 백마부대, 청룡부대 등 총 5개 사단이 투입되며,
1973년 철군까지 총 32만여 명의 한국군이 베트남 전선에 파병됩니다.

이 숫자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규모이며, 전쟁에 파병된 병력 수만으로도
한국이 이 전쟁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파병 장병들은 미국에서 받은 급여의 약 70% 이상을 한국으로 송금하였고,
그 외화는 국가 통제하에 외환보유고로 축적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한국의 건설 기업과 상사업체들은 베트남 현지에서
도로, 교량, 항만, 병영시설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됩니다.

삼성물산, 현대건설, 대우개발 등은 이 시기에 베트남에서의 첫 해외 경험을 쌓았고,
이것이 훗날 중동 건설 붐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군은 미국의 현대식 장비를 접하면서 실전 경험을 쌓았고,
이는 이후 한국군의 무기체계 발전과 전투력 강화에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한국군이 전장에서 매우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맹호부대와 백마부대는 정글전, 야간전, 게릴라 소탕작전 등에서
철저한 훈련과 조직력, 전투 의지로 인해 미군에게조차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군”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맹호부대는 베트남 중부 퀴논 지역에서 민심 확보 작전과 함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잔당 소탕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미군은 “맹호부대가 있는 지역은 절대 뚫리지 않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신뢰했고,
실제로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은 대부분 전선이 안정되었다는 분석도 존재합니다.

전투뿐 아니라, 한국군은 의료지원, 도로복구, 학교 건설 등 민사 작전도 함께 진행하며
단순한 ‘전투병력’ 그 이상으로서의 가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종합적인 활동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물론,
국내적으로도 자긍심과 국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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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의 파병은 단순히 병력을 보내고 돈을 번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선택은 한국 경제 구조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산업화와 수출 성장의 결정적 발판이 되었습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이 베트남 파병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는 약 10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 금액은 단순한 현금 수입을 넘어, 경제의 혈관과도 같은 외환 보유고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연간 수출액이 1억 달러도 채 안 되었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10억 달러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 외화가 국가 주도의 산업 기반 확충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포항제철입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 없이는 산업도 없다’는 판단 아래 국가 주도로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자본도, 기술도, 국제 신용도 부족한 한국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베트남 파병으로 벌어들인 외화와 미국의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일본과의 기술 협력 및 차관 유치가 가능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포항제철은 훗날 **세계적인 철강회사 ‘포스코’**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이 시기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군수물자를 공급하던 한국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기계·화학·전자 부품 산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게 됩니다. 이들이 훗날 한국 중화학 공업의 뿌리가 됩니다.

게다가 베트남에서 경험을 쌓은 건설업체들은, 이후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진출하게 됩니다.
현대건설은 이때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국제 입찰에 익숙해졌고,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리야드 도로 공사 등을 수주하며 중동 건설 신화의 주인공이 됩니다.

즉, 베트남 전쟁은 단순한 외화 수입 이상의 가치를 가져왔습니다.

실질적인 외화 유입

해외건설 및 수출 기반 확립

기초 산업 인프라 건설 (제철, 기계, 화학 등)

실전 경험을 통한 인적 자원 성장

미국과의 정치적 신뢰 강화

이 모든 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을 뒷받침한 숨은 동력이었습니다.

1960년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국민 대부분이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
그때 대한민국은 결단을 내립니다.

"전쟁을 이용해서, 국가의 미래를 바꾼다."

많은 이들이 반대했고, 실제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걸고 베트남 전선에 투입됐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됩니다.

단순히 군인을 보내고 돈을 번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돈을 가지고 공장을 세웠고, 철을 만들었으며, 기술을 배우고, 세계 시장에 도전했습니다.

전장에서 싸운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외화를 벌어왔고,
그 외화는 나라를 위한 종잣돈이 되었습니다.

또한, 베트남에서의 실전 경험은
한국군이 자주국방 체계를 갖추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건설사들은 해외에서 돈을 버는 방법을 배워
중동, 동남아,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미국과의 신뢰는 외교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IMF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에서도
한국은 ‘전쟁을 이겨낸 나라’가 아니라
‘위기를 기회로 만든 나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희생과 인내, 그리고 철저한 계산 속에서 서서히 이뤄졌습니다.

1964년, 우리가 파병을 결정하던 그 순간,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우리 젊은이들이 남의 전쟁에 가서 피를 흘려야 하나?”

그 질문은 정당했습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 나라가 살아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가난했던 나라, 아무것도 없었던 나라,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나라.

전쟁은 재앙이었지만,
그 재앙 속에서 우리는 기회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계가 놀라는 경제 기적의 시작점에는
그 시절, 그 전쟁, 그 결단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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