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조국 물량이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승전 4개국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을 4개로 쪼개어 분할점령 및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역 한복판에 있었지만 수도라는 특성상 역시 4등분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동서 진영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습니다.
특히 소련은 당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보여주는 미국의 마셜 플랜(유럽을 재건 시키기 위한 자금 지원 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3개국이 공동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서독에 도입하고 마셜 플랜을 집행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소련은 만약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3개국이 합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결국 소련은 1948년 1월 베를린행 영국과 미국의 열차를 멈춰세우기 시작했으며 3월 20일 소련은 베를린 소재 연합국 통제 이사회에서 탈퇴하였고 3월 25일 베를린과 서방 연합국의 점령지대 사이를 오가는 열차를 통제해버렸습니다. 6월 18일에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봉쇄하고 소련 점령당국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으면 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렇게 6월 24일 서베를린에 최소한적으로 이뤄지던 생필품의 공급이 전면적으로 중단되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모스크바에 있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권력자 스탈린의 결정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소련은 핵개발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종전 3년 만에 더 벅찬 전쟁을 치른다는 건 역부족이었기에 서방과의 새로운 전쟁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으나 나중에 서방과의 관계나 독일 문제에 있어 연합국보다 우위를 차지할 필요성은 있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소련의 이런 말도 안되는 베를린 봉쇄(BerlinBlockade)로 인해 인구 200만의 대도시 서베를린은 졸지에 굶주리게 되는 상황이 되버렸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연합국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와 영국도 소련처럼 본토에서 전쟁을 치른 상태였고 미국도 백악관 회의에서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피할 수 없으며 베를린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사실 미국도 소련과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당시 서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 병력만 50만이었고, 동독에 전개한 소련군 전체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반면 미국은 종전 후 급속한 감군으로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쟁은 피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피하고 베를린 봉쇄를 풀기위해 대규모 공수작전이 제시되었으나 일 평균 3,600톤의 물자를 서베를린으로 공수해야 한다는 보고에 좌절해야 했습니다. 설사 공수작전을 감행한다 해도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으며 수송기들이 중간에 소련기의 방해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를린 공수 강행을 공군에 지시했습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 퇴역시켜 창고에 두었던 수송기들을 모조리 꺼내고 퇴역한 예비역 파일럿들을 재소집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럽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진휘와 함께 말도 안되는 물량의 공수작전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작전개시 단 1달만에, 작전에 투입된 미군 수송기는 1,000여 대에 육박했습니다.
미국의 1일 공중수송능력은 1천톤은 가뿐히 넘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면서 미국의 말도 안되는 물량은 소련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습니다. 1월에만 171,000톤, 2월에 152,000톤, 3월에 196,223톤의 물자가 각각 공수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수 물자는 초기엔 식량과 석탄 등의 필수품으로 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종사였던 게일 핼버슨(Gail Halvorsen)중위를 시작으로 조종사들이 개인적으로 가져간 사탕이나 초콜릿 등을 손수건으로 싸서 공중에서 베를린에 떨어뜨렸고 이후 수많은 조종사들이 사탕과 초콜릿을 낙하산으로 베를린에 떨어뜨렸습니다.
베를린 아이들에게는 게일 핼버슨은 영웅과 같은 존재였으며 아이들은 그의 수송기를 건포도 폭격기(raisin bomber)라고 불렀습니다.
이 작전이 알려지면서 베를린 시민과 독일 국민들의 지지가 커졌고 미국 국민의 대중적인 지원이 쏟아졌습니다. 미국 제과협회에서는 게일 핼버슨 중위에게 필요한 물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은 후 수톤 규모의 초콜릿과 사탕, 껌을 지원했고, 미국 학교에서는 사탕과 껌을 매단 낙하산을 만들어 독일의 미군 공군기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1949년 1월까지 모두 25만 개의 군것질 낙하산이 공중에서 투하하되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물량을 바라본 스탈린은 미국의 공수를 방해하고 봉쇄를 유지하려면 전투기를 동원해 직접 요격하는 방법뿐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미국과의 전면전쟁을 의미했기에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고 결국 봉쇄 8개월만인 5월 12일 봉쇄령을 해제하였습니다. 그렇게 소련의 베를린 봉쇄는 대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만을 재입증 시켜주었습니다. 이후 스탈린은 죽을 때까지 미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회피했습니다.
베를린 봉쇄 기간 동안 연합국 공군은 총 27만 8228회의 비행을 통해 물자 232만 6406톤(미국 공군178만 3573톤, 영국 공군 54만 1937톤)을 공수했습니다. 이 작전기간동안 미국은 사고로 수송기 17기를 잃고 31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영국은 8대의 수송기와 39명의 파일럿들을 잃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공수작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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