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쿠데타
북한의 독재정권이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사실 김정일은 암살과 쿠데타를 우려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으며 지금 현재 김정은도 핵심 간부들을 줄줄이 숙청 또는 처벌하면서 쿠데타에 대한 가능성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현재 일부 사람들은 북한에 쿠데나가 일어서 북한 정권이 붕괴되어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실제 북한에는 쿠데타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76년에 일어난 해주폭동, 1987년 온성 정치범 수용소 폭동, 1992년 프론제 군사 쿠데타 모의사건, 1995년 북한 인민군 6군단 쿠데타 사건, 1998년 황해제철소 시위 사건이 있습니다. 특히 프론제 군사 쿠데타 사건과 6군단 쿠데타 사건은 성공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6군단 쿠데타는 여성 정보원에 의해 허무하게 실패하였습니다.
만약 6군단 쿠데타 사건이 제대로 성공했다면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북한의 모습보다는 더 좋을 수도 있고 이미 통일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1992년에 일어난 프론제 군사 쿠데타 사건은 실패한게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사실 프론제 군사 쿠데타 사건이 성공했다면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것입니다. 당시 쿠데타를 이끈 인물들은 영화 '강철비'처럼 우리나라를 침공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론제 군사 쿠데타에서 프론제는 1918년에 설립된 소련군 장교 교육기관으로 적백내전 당시 소련군의 총사령관이자 소련군을 대대적으로 개편한 미하일 프룬제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군사학교 명칭입니다. 당시 소련은 북한 내에 제 2의 소련파를 육성하기 위하여 소련에 있는 북한 학생들을 KGB 소속의 백인 미녀들과 술을 이용해 꼬셨습니다. 그렇게 당시 프론제 유학생들은 북한 내부정부를 돈을 받고 KGB에게 넘겼습니다. 덕분에 프론제 유학생들은 김일성이 내준 장학금과 KGB가 준 돈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북한은 프론제 유학생들에게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북한은 유학생들에게 잠시 귀국했다 소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 했지만 유학생들이 귀국한 뒤 말은 바뀌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소련에서 풍족한 생활 대신 열악한 북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당연히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프론제 군사학교에서 배워왔던 사회주의에 대한 이념과 지금 북한 차이를 느끼게 되자 같은 유학생들끼리 뭉쳐 비밀 단체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1991년에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최고사령관 직을 물려주자 이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1993년 김정일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일본의 천황처럼 신격화하고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다음에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고 김씨조선 체제를 유지하는 주체사상으로 왜곡된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을 정통 사회주의로 개조한 후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적화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프론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이 쿠데타는 최룡해의 매부였던 홍계성이 이끌었습니다. 당시 홍계성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인민군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상태였습니다. 참고로 그 계급장은 김정일이 직접 달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쿠데타 가능성이 높았던 이유는 홍계성 뿐 아니라 프룬제 군사학교 출신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과 전투훈련국장 안종호 그리고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었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프룬제 군사학교 출신의 사단장 5명이 거느린 부대도 쿠데타 계획에 합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인민군창군 60주년이 되던 1992년 4월 25일 열병식 주석 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전차로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더군다나 열병식에 동원된 전차는 프룬제 군사학교 출신 김일훈 소장이 관할하는 수도방위사령부 전차사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인민무력부 국장 박기서가 수도방위사령부의 전차를 동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수도방위사령부 대신 인민무력부의 전차가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면서 1차 쿠데타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이런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고 1차 쿠데타가 실패하자 기존 KGB의 한 간부가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 계획을 폭로하였습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김정일은 프룬제 출신들을 인민군 보위국에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1993년 2월 8일 프룬제 유학생들에게 중대회의가 있다고 불러낸 다음 작전조가 투입되었습니다.
그렇게 쿠데타를 주도했던 홍계성과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지휘관 70여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간에 걸쳐 모든 프룬제 유학생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보위사령부는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검열했는데 1998년 양강도 혜산시에서만 2백여 명의 당, 행정, 사법기관 간부들을 공개 처형하였으며 가족들은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의 쿠데타 모의가 실패한 후 그 공로를 인정받은 인민무력부 보위국은 인민군 보위사령부로 승격됐고, 보위국장이었던 원흥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에서 단숨에 대장으로 승격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북한은 해외 군사학교에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의 쿠데타가 성공하였더라면 이들이 세운 계획대로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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