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신

by 칠십 살 김순남

20대 초, L 은 정말 나에게 좋은 친구였다. 서울에서 잠시 몸 담고 있던 직장에서 만난 친구였지만, 직장을 떠나서도 오래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다. 그 당시 엄마와 나의 생활은 온전치 못했다. 결혼한 큰 오빠에게 의탁코자 엄마와 나는 잠시 큰 오빠가 직장 생활하고 있는 마산으로 내려와 있었던 때였다. 서울 생활이 많이 그리웠던 어느 날, 무턱대고 서울로 갔다.


친구 집은 일곱 명의 형제가 한 방에 자는 가난한 집이었다. 그런 집에 나를 데리고 가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며칠을 함께 지냈다. 마산으로 내려오는 날, 친구는 날 데리고 미도파 백화점 앞 금은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고 있던 1돈짜리 금반지를 팔아 그 돈에서 반을 떼어 나에게 주었다. 그 시절 젊은 청춘은 너나없이 가난한 때였다. 나는 염치도 없이 그 돈을 받아 들고 왔다. 그리고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난 때였다. 그 사이 친구와 편지를 간간이 주고받았다. 결혼을 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강한 반대로 혼자서 시댁이 있는 부산으로 와서 집에서 간단히 치르기로 했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부모님이 왜 그 결혼을 적극 반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친구는 결국, 사랑이란 이름의 용기로, 혼자서 내려와 좁은 시댁의 한옥에서 말 그대로 정화수와 음식 몇 가지를 놓고 혼례를 치렀다. 그 시대에도 보기 드문 순수하고 착한 성품을 지닌 친구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날, 엄마가 나를 부르며 ”어떤 아줌마가 널 찾아왔네.” 한다. “아줌마?” 하며 나가보니 L이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긴 월남치마를 입고서는 반가운 듯, 멋쩍은 듯한 미소를 띠며 ‘나야.’ 한다.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정말, 그 사이 열 살은 더 먹은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친구는 그동안 주고받았던 편지 봉투에 적힌 내 주소를 찾아서 물어물어 왔다고 했다.


결혼할 때 친정집에서 한사코 말렸던 결혼이었다. 결혼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고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결혼을 하고서는 이런 몰골로 가기가 정말 싫었다며,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친구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뱃속의 어린 생명과 함께 왔다. 그녀는 한창 어려운 시간에 있었다. 엄마가 밥을 맛있게 지어 상을 차렸다. 식초와 설탕을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친 미역줄기를 맛있게 먹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시집살이의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도 “잘 왔다.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편하게 당분간 지내”라고 했다. 그날, 친구는 남편과 헤어져 혼자 살 생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아이를 혼자 낳아 잘 기를 거라고 했다. 며칠만 여기서 신세 지면, 자기가 할 일을 찾아보겠다고도 했다. 마음이 완전히 굳어진 듯했다. 늦은 밤까지 우리는 그동안 못다 한 각자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친구에게 어떤 일을 찾아줄까 고민도 했었다.


그날 밤이 지났다. 친구는 밤에 잠을 잤을까 싶을 만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라고 했다. “아니, 집에 가려고” 친구가 말했다. “어느 집?” 친정에 가려고 하는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친정집이 편하지 친구 집이 편할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친구는 시댁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하루 만에 맘이 바뀌었다. 아니, 밤사이 마음이 바뀌었다. 말인즉, 밤새 생각해도 남편이 너무 안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신체적으로 심하게 하자가 있는 사람이었다. 친정에서 그렇게 말렸던 이유였다.


시어머니가 힘들게 해서 집을 나왔지만, 남편은 자기가 힘들어서, 자기를 건사하기 힘들어서 나갔다고 생각할 거란 것이다. 얼마나 자책을 하겠느냐고, 신랑이 너무 가엾다고 했다, 죽어도 가서 죽어야겠다면서 아침 일찍 시댁으로 갔다. 나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밤사이, 그녀의 마음과 생각은 우주를 한 바퀴 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애초의 자신으로 돌아가 순수와 사랑을 찾아 다시 복귀했다. 내가 그 친구를 그리워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친구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렇게 다시 돌아간 L은 내가 시집도 가기 전에 세 아이를 낳았다. 그 사이에 나에게도 변화가 있어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부산으로 직장을 옮긴 큰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부산에 연고라고는 친구인 나 하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나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고 위로였다, 직장에 다니면서 가끔씩 그녀의 집에 놀러도 갔다. 그때마다 친정 언니처럼 맛있는 밥을 정성껏 해 주었다. 때로는 친구가 긴 예쁜 무늬의 월남치마를 입고 내 직장 근처로 와서 나를 불러내어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했다. 친구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아이 셋이 딸린 하위층에 속한 내 친구가 문화의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때 명동 어느 커피집에서, 종로 어느 커피집에서 차를 마셨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했었다.


언제부턴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하던 친구가 입을 떼었다. 자기 오빠 어떠냐고 물었다. 친구의 오빠는 서울 놀러 갔을 때 두 번 본 적이 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큰 오빠 집에 얹혀 있을 때여서 나도 시집 마음이 전혀 없지 않았을 환경이었다. 과년한 여동생이 시집도 못 가고 있어서 내심 걱정하던 오빠는 군의관과 선을 보게 되었다고 하니, 너무 좋아했다. 큰 오빠는 뭘 망설이냐며 서둘렀다.


친구의 오빠는 강원도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시간을 내어 부산으로 나를 만나러 내려왔다. 그 당시에는 강원도에서 부산으로 오는 것이 하루가 걸릴 때였다. 친구와 친구 오빠, 나, 우리 오빠는 어느 다방에서 만났다. 그리고 양쪽 보호자의 마음으로 다시 만나, 날을 잡기로 했다. 먼 거리라 데이트가 이루어질 시간이 없었다. 어찌 보면 친구의 오빠라는 위치만 빼면 중매,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 친구와의 오랜 우정, 안면식이 있는 친구의 오빠, 서로 간의 신뢰는 이미 다져진 상태라 결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무리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운명이란 이상하게 우리를 몰아간다. 그 시점에 내가 다니고 있던 학원에서 두 남자 사이에 나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 한 남자가 나에게 열정적으로 대시를 했고, 나는 대시에 마음이 갔다. 친구의 오빠는 멀리 있고, 이 남자는 바로 옆에 있었다. 매일 옆에서 따라다니는 남자에게 더 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친구 오빠와의 결정적 약속을 취소했다. 당사자와 친구뿐 아니라 양가 보호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 나는 지금의 이 남자를 택했다. 눈에 콩깍지가 씐 것이다.


빠르게 결혼 날짜를 잡았다. 데이트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결혼식 날, 정신없는 날이다. 식이 끝나고 친척들 사진 촬영이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왁자하고 번잡한 속에서 누군가가 내 웨딩드레스를 살짝 잡아당긴다. 아, L이었다. 살며시 웃으며, “축하 해. 선물 놓고 갈게. 잘 살아.” “응, 잘 가.”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는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렸다. 친구가 어떻게 돌아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남편과 데이트에, 결혼식 준비에, 친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L은 내 동네 친구도 학교 친구도 아닌, 내가 잠시 서울에서 몸담았던 직장의 친구였다. 거기다 그녀는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는 아줌마였다. 그러니 그 당시 내 친구의 무리에 끼일 수도 없고, 함께 사진을 찍지도 못할 위치였다. 나는 친구가 결혼식에 온 것도 몰랐다가 그 순간에서야 그녀를 알아봤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축의금 대신으로 받은 여러 선물을 챙기다가 친구의 이름을 보았다. 예쁜 커피세트였다.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이쁜 내 친구야, 너무 이쁘더라, 내 올케가 되었으면 평생 친구 삼아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인연은 아니었나 봐. 행복하게 잘 살아, ” 순간 와락 눈물이 나왔다. 아,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불과 며칠 만에 내 눈의 콩깍지가 걷어지면서 아, 실수, 실수했구나, 착한 친구를 배신한 내 행위를 가슴 치며 후회했다. 내 죄가 있으니 친구를 찾아볼 면목이 없었다. 지금처럼 폰도, 아니 전화도 없는 집이 있을 그런 시대였으니. 내가 집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났다. 나 역시 L못지않은 시집살이에 몸도 마음도 찌들어갔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친구를 떠올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도, 금반지도, 미도파 백화점 앞 금은방도. 그녀의 긴 월남치마와 20살이 갓 넘었을 때 뱃속에 새 생명을 넣고 초췌한 모습으로 먼 곳에 있는 나를 찾아왔던 그녀를 생각했다.


첫 아이가 3살쯤이었다. 가난하고 힘들고 슬픈 시집 살이었다. 친구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녀가 차려주던 엄마 같은 밥상도 그리웠다. 그녀의 오빠를 내친 나의 뻔뻔함으로 미안했던 마음은 현재의 지친 내 시간으로 덮어져 있었다. 아이를 업고 범일동 꼭대기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좁은 골목 언덕 위에 있는 그녀의 오래된 한옥 문 앞에 커다랗고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집 비어 있음. 부동산 000-000.> 대문 앞 좁은 디딤돌에 앉아,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새삼 나의 배신이 내 가슴을 찔러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