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가 겨우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다. 나 보다 몇 달 먼저 아이를 낳은 큰 시누이가 친정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방이 두 칸 밖에 없었던 시집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바로 옆, 여러 가옥이 함께 살던 곳에 부엌이 딸려있는 방 한 칸을 임시로 세를 얻어 살게 했다. 살림은 따로 인듯하지만, 잠자리만 그곳에서 할 뿐, 아침이면 구멍가게를 하는 시집으로 가서 가게를 보고 그곳에서 대부분의 일을 마치고 저녁에 집으로 왔다.
몸살이 닷새 정도 엄청나게 크게 왔을 때였다. 아이 젖을 물리며 잠들었다가 다음날 일어나지를 못했다. 몸을 일으킬 힘도 없을 만큼이었다. 몸이 불덩이었다. 그 당시는 모두가 천 기저귀였다. 아기가 볼일을 보고 나면 기저귀를 바로 빨아야 하는데, 몸을 추스르지를 못하니까 겨우 기저귀를 갈고서는 양동이에 넣어놓고 뒤에 빨려고 뚜껑을 덮어 놓았다. 남편도 아이 기저귀를 갈아줄 줄은 알았지만, 빠는 것 까지는 해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당시는 그런 것은 남자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시대였다.
며칠 만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양동이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기저귀가 독한 똥에 엉겨 붙어 새까맣게 삭아져 있다. 도저히 재생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 사이에 시어머니는 내가 집에 안 오니까 웬일인가 싶어 두 어 번 다녀가셨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기저귀를 처리하고 시집으로 갔다. 시집도 여러 가구가 함께 살던 곳이었는데, 우리 집 앞 빨랫줄에 기저귀가 눈부시도록 하얗게 펄럭이고 있었다. 시누의 딸 기저귀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딸과 며느리의 차이인가? 그 설움과 괘씸함은 오래오래 갔다. 아마 그네들은 기억을 못 하겠지만 내 딸에게도 내 아들에게도, 남편에게도 한 번은 이야기를 섧게 했었다. 시어머니의 편견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누구도 내 비애를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오래 살았나 보다. 어느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어쩌면 어머님이 똥 기저귀가 들어있는 양동이를 못 봤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방으로 들어오려면 부엌문을 먼저 열고 들어와야 하는데, 양동이가 문 바로 옆에 있었기에 당연히 봤을거라고만 생각했었다. 어머니는 결벽증이 있다고 말할 만큼 깔끔하신 분이셨다. 우리 집은 물론이고 작은 아들 집에 가서도, 큰딸 집에 가서도, 작은 딸네에 가서도 살림을 기웃거리고 내 집처럼 정리하고, 못 마땅하면 잔소리하시는 분이셨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도 어머님의 삶은 녹녹지 않았다. 녹녹지 않았던 피곤한 시간에 어쩌면 며늘의 그 양동이가 눈에 안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글쎄, 내가 어느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해인지는 모르겠으나, 60이 넘은 어느 시간에, 내가 며느리를 보고 난 후 어느 시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것을.
그때 아이를 낳고 6개월 정도 그 좁은 친정집에서 지낸 시간을 큰 시누는 기억도 못 하는데. 어디 그뿐이랴, 내가 지난 섦움에 며늘에게도 딸에게도 아들에게도 한 번쯤 했던 신세타령을 어느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 듯한데, 나는 괜스레 내 마음속에 미움 한 자락, 설움 한 자락을 재여 두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 쓰잘데 없는 기억이다. 그래, 훌훌 털자, 앞으로의 내 노년의 시간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 않는 기억과 추억일랑 훌훌 털자. 훌훌 털어버리고 비어버린 그 공간에, 앞으로 남은 내 시간을 채울 여력을 축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