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와 다음 주가 고비라고 한다. 신종 코로나로 세상이 떠들썩 해짐과 동시에 우리는 혹시라도 바이러스에 노출이 될까 봐 그때부터 스스로 자체 격리를 선택했다.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생활한 지 어느새 보름이 지났다. 생활 자체로만 보면 조금씩 답답함이 마음속에 생겨나고 있다는 걸 빼면, 못 견디게 힘든 상태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해가 나는 날이 많지 않은 늦겨울이라 이런 상태가 오래가면 적잖은 사람들이 심적으로 우울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과 같은 생활을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가야 할지도 문제지만, 본격적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하는 다음 주나 다다음주부터 또 다른 눈에 띄는 변화가 발생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가끔 먹거리를 사기 위해 집 앞 마트에 가는 일 외에는 전혀 외출을 하지 않고 있지만, 상해에서만도 25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니 불안감 또한 없지는 않다. 게다가, 가족 중 누군가가 혹시 이 상황에 어딘가 다른 곳이 아프거나 갑작스러운 위급 상황이라도 생기면 이곳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하는 것은 언제나 나를 긴장을 하게 한다.
며칠 전에는 오랜만에 햇살이 하도 봄날 같이 따뜻해서 창문을 활짝 열고 아침부터 부산스러운 청소를 했다. 평소 추위를 잘 타지 않아 한 겨울에도 집안에서 러닝셔츠만 입고 활보하기 일쑤인 둘째가 햇볕이 너무 따뜻하다고 창문 아래에서 한참을 앉아있더니 얼마 후부터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재채기도 한번. 한참 후 또 한 번. 설익은 봄바람에 감기 기운이 찾아온 거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족 중 누가 재채기 한 번만 해도 온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 든다. 거실에서 책을 읽다가, '저러다 혹시 감기가 심해져 목이 아프거나, 열이라도 오르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머리에 이고 사는 내 머릿속이 그때부터 갑자기 심난해지기 시작했다.
처방전이 필요 없는 집밥
냄비에 물을 붓고 다시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가스렌즈에 부리나케 불을 켰다. 마음이 심란하고 생각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 시작할 땐,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거나 주방에 서서 음식을 만든다. 마음의 근심과 복잡한 생각의 타래를 한곳에 집중하다 보면, 맛있는 음식이 완성되어 갈 즈음엔 뒤엉키거나 눈덩이처럼 커져 버릴 것 같은 걱정과 불안도 차분하게 포개져 정리가 되곤 한다.
아들을 위한 점심메뉴는 '버섯 매운탕'이다. 폭 끓여낸 맑은 육수에 고추장을 풀고, 고춧가루도 조금 넣어, 다진 마늘을 한 스푼 풀어주었다. 국간장도 조금, 참치 액젓도 조금. 맛술도 한 스푼, 느타리버섯과 표고버섯, 새송이 버섯, 팽이버섯은 흐르는 물에 씻어 접시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미나리나 참나물을 대신해서 중국에서 구하기 쉬운 청경채를 꺼내 두었다. 칼국수 면은 살짝 삶아 그릇에 담아내고, 샤부샤부용 고기를 하얀 접시에 정갈히 옮겨 담은 후 휴대용 가스렌즈를 꺼내 식탁 위에 올리고 불을 켰다.
바글바글 끓는 얼큰한 육수에서 쉬지 않고 김이 오르면 머리를 맞대고 얼굴이 발그레해지도록 호로록호로록 먹다가 자작하게 남은 국물엔 다진 야채와 달걀 하나, 김가루, 참기름을 넣고 밥 한 공기를 섞어 타다닥 소리가 날 때까지 살짝 누른 볶음밥을 만들어 식사의 마지막 화룡정점을 찍는다. 말하진 않았어도 내심 걱정이 되어 힐끔힐끔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된다.
'아프면 안 되는데...'
땀을 쭉 빼며 볶음밥까지 든든히 먹고 숟가락을 놓고 난 아들의 얼굴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근심스러운 감기 기운이 싹 사라지고 말갛기도 하고, 벌겋기도 하게 기운 좋은 생기가 돌았다.
' 됐다... '
아들의 감기는 집밥을 이기지 못했다.
엄마, 이제 집밥 제가 해드릴게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서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우리 마음속 생채기의 딱지가 떨어지기도 전에 엄마는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다. 무너졌다. 가까스로 다시 세우고 있는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바로 몇 년 전 이제 좀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겨우 설득을 해서 부모님은 분당에서 일산으로 이사 오셨었다. 가까이서 그 행복을 오래 누리지도 못하고 아빠를 보내드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엄마마저 암이라니 그때 나는 참 암담했다.
엄마는 수술을 받으셨고, 항암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반짝반짝 아름답던 머리카락도 모두 잃었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건강을 찾으실 때까지 엄마는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셨는데, 그때 우리 두 아들들은 아직 어렸었고 챙겨야 할 일이 많은 나이였다. 그렇게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항암 치료가 시작되면서 엄마는 입맛을 잃으셨고, 어떤 음식을 해 드려도 잘 드시지를 못했다. 무엇을 해 드려야 입맛이 돋으실지 고민해서 가장 신선한 재료로 장을 봐와서 매끼마다 주방에서 종종거렸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점심은 엄마와 나 둘이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매일 혼자 간편하게 먹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간단히 바깥에서 식사를 해결하다가 삼시 세 끼를 신경 써서 암환자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려니 그것부터 사실 쉽지만은 않았다. 어느 날 점심엔 엄마를 위해서 아삭아삭한 양상추를 곁들여 바삭하게 튀겨낸 닭고기로 유린기를 만들어 드렸다. 감칠맛 나는 소스도 만들어 정성껏 식사 준비를 했는데, 엄마는 한 점을 드시다 말고 입이 너무 쓰다며 하나도 드시질 못하셨다. 그날은 유독 몸도 마음도 참 힘들었다. 내가 엄마를 위해서 크게 하는 게 없어 보였는데, 그 별거 아니여 보이는 하루하루가 반복되면서 알게 모르게 나 역시도 많이 지쳐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식탁을 정리하고 돌아서서 설거지를 하는데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는 주방 냉장고 한편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렇게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하던 어느 날에는 면역력이 약해지셔서 아주 심한 감기에 걸리신 적이 있었다. 얼른 살이 예쁘게 오른 노란 배를 깎아 통후추를 나란히 박고, 생강과 꿀을 넣어 배숙을 만들었다. 그리곤, 다시 냄비에 물을 붓고 다시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육수를 내서 총총총 썬 배추김치와 콩나물을 한 움큼 듬뿍 넣어 콩나물 국밥을 끓였다. 알싸하게 매운 청양고추도 살짝 올리고, 빛깔이 고운 홍고추도 살짝, 갓 구운 김을 부셔 김가루도 솔솔, 말갛게 고운 새우젓도 곁들여 바글바글 끓는 뚝배기를 상에 올려드렸다. 그날 엄마가 드시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셨을 때의 그 모습은 며칠 전 아들이 버섯 매운탕을 먹고 말갛기도 하고 벌겋기도 하게 생기가 돌던 그때와 같았다. 그리곤 그날로 엄마의 지독한 감기는 뚝 떨어져 나갔다.
엄마는 지금도 그 날의 콩나물국밥 얘기를 종종 하신다. 그게 얼마나 맛있었던지, 얼큰하게 팍팍 끓여낸 뜨끈한 그 국물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하신다. 엄마가 말끔히 비워낸 그 그릇을 치우며 나도 얼마나 기뻤던지 다시 앞치마 끈을 동여 메고 주방에서 종종 거리는 일이 한없이 즐거워졌다.
'엄마가 해주셨던 그 사랑의 집밥을 이젠 지치지 않고 매일매일 제가 해드릴게요!'
집밥의 힘
내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 중 하나, 정확히 믿는 것 중 하나가 집밥의 힘이다.
집밥은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호사스러운 그릇에 담아내지 않아도, 값비싼 고급 재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좋다. 투박한 그릇에 혹은 짝이 안 맞는 그릇에 담겨도, 반찬 가짓수가 넘쳐나지 않아도 가족을 위해 만드는 집밥에는 행복이 묻어난다. 윤기가 흐르는 갓 지은 밥 한 공기에 호박과 감자, 두부 등 냉장고 속 소박한 야채를 넣고 끓여낸 된장찌개 하나만 있어도 마주 앉아 함께하면 왕후의 밥상과 다를 바가 없다.
[ 뚝배기에 계절을 담아 끓여내는 소박한 된장찌개 ]
어느새 우리는 한국을 떠나 생활한 지가 8년이 되어간다. 떠나올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도록 해외생활을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채워져가고 있다니 시간은 언제나 내 마음 따위엔 관심조차 없이 그렇게 흘러간다. 나는 상해에 나와서도 쉬지 않고 일을 해 온 일하는 엄마였고, 일하는 아내였다 보니 삼시 세 끼가 지긋지긋한 날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일이 많은 날은 저녁 8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오게 되는 날이 많았는데, 그렇게 힘없이 늘어진 배춧잎 꼴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내 배도 등가죽에 붙었지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 배는 이미 쪼그라져 있을게 뻔한 날도 많았다. 임시방편으로 반찬을 시켜서 먹기도 했고, 주문 음식으로 한 끼를 때우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집밥을 해 먹는 것보다 지불해야 하는 돈은 더 큰데 뭔지 모르게 먹고 나면 건강하고 행복한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다. 어쩔 수 없이 한 끼 때우기 위해서 먹기는 하지만, 두 번을 연달아 먹고 싶지는 않은 맛이랄까. 그래서 나는 힘들어도 밥을 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 빠른 시간 안에 식사 준비를 해야 하다 보니 덤으로 손이 더 빨라졌다. 퇴근해서 돌아오자마자 겉옷만 벗고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주방에 들어가 밥을 안쳤다. 툭탁툭탁, 타다닥 식사 준비를 마치고 온 가족이 함께 식탁에 앉으면 휴우- 긴 숨이 절로 나오지만, 한 가지를 해 먹어도 왜 그렇게 맛있고 왜 그렇게 행복한지. 그렇게 두 아들들이 청년이 되어갈 때까지 나는 쉬지 않고 밥을 했다.
밥 잘하는 플로리스트
나는 밥을 잘하는 플로리스트다. 밥을 맛있게 하는 플로리스트인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기 때문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꽃만큼이나 집밥을 사랑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학 생활 중인 큰 아들은 매일 나누는 톡에 자주 엄마의 집밥이 그립다는 말을 한다. 우리의 엄마들이 대부분 그러셨던 것처럼 나 또한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고,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엄마의 집밥을 그렇게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집밥에서는 사 먹는 음식과는 달리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커다란 마음과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집밥은 지친 일상을 위로해주고 넘어진 마음을 일으켜 세워주는 힘, 파이고 까진 마음에 새 살이 돋게 하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나는 너희들을 사랑해. 오늘도 모두 수고했어'라고 전해주는 메시지가 담겨있고, 그 사랑을 매일 먹고사는 사람들의 마음 밭에는 건강하고 윤기가 넘치는 흙이 반짝반짝 깔려있어서 어떤 씨앗을 심든지 건강한 생각이 자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꽃을 좋아하는 이유도 집밥을 좋아하는 이유도 다 같다. 꽃도 집밥도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행복의 메시지와 치유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음식을 하는 시간이 즐겁고, 꽃을 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만일 내가 나에게 스스로 상을 줄 수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의 우물 저 깊은 곳에서 쉬지 않고 물을 길어 마음 담은 밥상을 차리고 있다는 것, 그거 하나로는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