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찾아 삼만리
아무런 흔적 없이 하루아침에 집을 나가버린 엄마의 부재로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자전거로 한 시간 남짓 옆 동네 세탁소로 출퇴근하며 일하시던 아버지는 그날로 무너져 일을 할 수 없으셨고 이제 갓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학교를 오가며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력자였다. 초등학생, 중학생 동생들은 말해 무엇하랴.
일주일가량 엄마의 흔적을 찾아 미친 듯 돌아다녔지만 동네 단골 미용실 아주머니도, 친하던 옷 수선집 아주머니도, 심지어 외할머니와 이모까지 그 누구도 엄마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하루는 엄마가 일했던 공장에 찾아가 행방의 단서를 얻으려 했다. 정대리를 만나 사실 확인을 하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엄마는 퇴근 후 종종 정대리와 술을 마시고 들어왔었다. 술 한잔도 못 마시는 아빠가 재미없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던 술을 좋아하는 엄마였으니까.
“아저씨가 정대리님 이신가요? 저는 김순자 씨 딸 박연수라고 하는데요, 우리 엄마랑 술도 마시고 자주 연락했던 사이라고 들었어요. 우리 엄마 어디 갔는지 알고 계시죠?”
“내가 어떻게 알아요! 김순자 씨 지난주 사직서 내고 안 나오는 거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나 참 어이가 없네. 내가 그런 아줌마랑 연락을 왜 해요! 멀쩡한 남의 가정 파탄 낼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정대리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엄마가 갑자기 불쌍한 여자로 느껴질 뿐이다.
수확은 없었지만 집에 돌아오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랜 걸음으로 곤한 몸을 차가운 방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멍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초점 없던 표정의 아빠가 갑작스레 몸을 벌떡 일으키신다. 육교가 어디 있냐며 엄마 말고 육교를 찾으셨다. 남겨진 본인이 처량해 견딜 수 없다며 죽으러 가겠다신다. 아빠의 절규에 정신이 번쩍 났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그날, 아빠와 나는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 버리고 떠난 사람 그만 찾고 보란 듯이 잘 살아보자는 말을 수 없이 주고받았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남편이랑 살기 싫다고 아이들 버리고 집 나간 엄마,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엄마를 향한 원망과 그리움에 할애할 만큼 마음도 크지도 않았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가족, 아빠와 동생들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이제 보통의 스물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저 엄마 아빠 딸로 살던 때와는 다르다. 평범했던 일상을 하나씩 하나씩 버려야 했다.
이 년 동안 만난 남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했다. 사정을 알고 본인 집에서 김치와 반찬까지 챙겨주던 따뜻한 친구였는데, 그 앞에서 계속 초라해지는 모습에 연애가 사치라며 냉혈 인간처럼 선을 그은 나는 독한 년 그 자체였다. 그리고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모아 보겠다며 입학한 지 고작 반년 만에 당차게 휴학계를 냈다. 빠른 생일로 국민학교를 7살에 입학한 사실이 처음으로 고마웠다. 일 년을 공짜로 얻은 기분이라고 사실은 다행이라며 안심했다.
기쁨도 잠시, 일할 곳을 알아보던 중 바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대학교 1학년이었지만 빠른 생일로 현재 19살. 법적으로 술도 담배도 못 사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에 발목이 잡힌 거다. ‘젠장, 이럴 거면 왜 빨리 입학시킨 거야.’ 전봇대마다 줄지어 있는 벼룩시장과 교차로 신문에는 온통 생산직 주부 사원만 모집해 진작에 포기하고, 잡코리아를 매일매일 뒤지며 결국 대치동에 있는 대형 문구점 캐셔로 들어갔다.
굳이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그곳을 선택한 건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던 마음이 커다란 용기를 낸 거다. 게다가 지옥철 2호선 출근길은 빽빽한 사람들 사이로 숨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으니 말이다.
한 달 뒤 통장에 찍힌 첫 월급 78만 원. 아웃소싱이라 3개월 동안은 10프로의 수수료가 떼인단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고3 겨울방학, 친구와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손목통증을 보너스로 받았던 시급 1900원 인생 이후 첫 월급이었으니까. 난생처음 만져보는 큰돈으로 생활비 걱정도 덜었으니 2교대 출근도 행복했다.
'이렇게 일 년만 더 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