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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어쩌면 소극적이라 지탄받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by 준우

지금, 삶은 길고 고되다. 반복되는 하루가 주는 두껍고 질척거리는 감각은 자주 정신을 뒤덮는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는지 이유를 찾기 쉽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러지고, 무뎌지며, 남들 또한 그러리라 생각하며 무심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의 미덕이 된다. 대다수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빠르고, 효율적이며 효과적인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 이것만이 좋은 삶이고, 훌륭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논리 아래에서 분명 틀린 말이 될 수 없다. 우습게도 이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기계다. 언젠가 우리는 기계에 많은 것을 대체당하게 될 운명에 처해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삶은 더 길어지고, 더 건조해지게 될 터다.


예술은 적어도 이와 같은 상황의 반대항에 놓여야 한다. 예외로 쉽게 떠오르는 자본주의의 논리 아래 작동하는 여타 작업들은 솔직히 말하자면ㅡ 길을 잃은 것이 아닐까? 예술만이 이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는데, 근래 많은 작업들은 그를 쉽게 망각하는 것 같아 보인다. 물론 그들도 논리가 있고, 의미가 있겠지만, 와닿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예술은 이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우리는 자주 데이터 속 숫자로 치환된다. 20대 남성, 대학생, 서울 거주 시민 등. 개개인의 삶보다는 기호들로 분류된 데이터 셋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그 집합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하는가. 예술을 그것을 세계에 드러낸다. 기술문명이 데이터로 환원하는 수많은 세계 속 정보들이 그렇게 단순하고 추상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목소리. 작품이 감상자에게 건네는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작품에게서 감상자에게 말하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면에서 메아리치는 목소리다. 이것이 구원의 실마리가 된다.


구원의 전제는 괴로움의 상태다. 어떤 존재가 구원받기 위해선 먼저 그는 괴로운 상황에 처해야 한다. 그렇기에 작금의 현실에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면서도, 도통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모두가 괴롭다면, 괴롭지 않은 상태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삶에 대한 구원을 입 밖으로 꺼내볼 수는 있나? 누군가 무엇으로 구원받았다는, 마음 깊게 와닿는 그런 이야기는 도통 들리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혐오와 멸시, 조롱, 온갖 사건 사고들이 삶을 어지럽힌다. 그러다 보면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에 대한 구토가 이는 순간을 기어코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무엇도 삶을 대신 구원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이겨내는 자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곁에서 작은 위로- 혹은 위안을 던지는 것.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다.


작성일 : 2025.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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