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로 했다, 이유는 모른 채로

프란츠 카프카《돌연한 출발》 독후감

by 박병수

독서 모임을 하기 전날 저녁, 테이블 위에 올려진 민음사판 프란츠 카프카 단편선에는 포스트잇이 가득했다. 카프카는 직접 말하는 법이 없다. <시골의사>에서 의사는 자신의 빈틈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그 공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환자를 구하지 못하는 무력감이 설명 없이 쌓였다. 읽는 내내 왜 이렇게 됐는지 묻지 않고 그냥 감내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유를 따지기 전에 이미 상황에 삼켜진 인간- 그게 카프카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고, 어쩌면 멍하니 서있는 나이기도 하다.


<돌연한 출발>은 너무나 짧다. 주인공은 이유도 목적지도 불분명한 채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여기서 벗어나는 것, 그것만이 나의 목표다"라고 답한다. 이 장면이 오래 머물렀다. 이직을 앞두고 읽은 이야기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혼자 거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1915년의 문장이 내 곁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모든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믿고 있지만 카프카는 나의 생각을 조용히 부순다. 원인 없는 불안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 출발점이 없는 고독까지 그 감정들이 나의 말보다 정직할 때가 있다는 것을. 숫자로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의 밑바닥에 가닿는다는 것을.


<변신>과 <선고>를 읽을 때 여러 감정들이 달라졌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는 장면보다,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방식이 서서히 달라지는 장면이 더 오래 남았다. 그레고르만 변신한 게 아니라 가족 전체가 변신했다는 독서모임 선생님의 해석이 나왔을 때 공감했다. 아버지와의 관계, 기대와 단절 사이- 카프카의 개인사가 이 긴장감과 겹쳐졌다. 변신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동생이 부모의 새로운 희망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모습이 유독 긴 여운을 남겼다.


민음사 출판사 프란츠 카프카 《돌연한 출발》 138p '변신'의 마지막 문장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


카프카는 말한 바 있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독서모임을 끝내고 저녁, 도끼는 책이 아니었다. 얼어 있던 내가 다른 선생님들의 해석을 들으며 잠깐식 녹았다. 카프카가 어떤 세상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분이 나를 따라왔다. 불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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