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밭 너머의 세계

by sleek


엄마는 밀밭 어딘가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황금빛 밀 이삭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냈다.


지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곡물의 바다.

그 속에서 엄마는 작은 섬처럼 홀로 서 있었다.

하늘은 석양에 물들어 꿀처럼 농밀한 주황빛이었고,

공기마저 달콤한 곡식 냄새로 가득했다.


그 순간이었다.


수천 마리의 나비들이 빛을 내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체라기보다 부서진 별 조각들의 군집 같았다.


나비들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공기 중에는

은하수 같은 가루가 흩뿌려졌고,


그들이 내뿜는 찬란한 빛에 시야가 하얗게 멀었다.

숭고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온몸을 집어삼킬 듯 압도적인 빛의 행렬이었다.


나비 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물결치며 엄마를 향해 밀려왔다.

소리도 없이. 아름답고도 압도적으로.

마치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 달렸다.


밀 이삭이 얼굴을 할퀴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빛나는 나비 떼는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왔다.

그러다 문득, 밀밭 한가운데 있을 리 없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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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머무는 집


숨 가쁘게 달려 도착한 곳에는

고딕풍의 정갈한 서양식 저택이 서 있었다.


오랜 세월을 견딘 석재는 부드러운 빛을 머금고 있었고,

둥글게 솟은 창문은 집의 눈이 되어 이방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미로처럼 구획된 정원은 자연과 인간이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며 합의를 본 듯 차분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의 비스듬한 햇살이

오래된 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소리 낮은 대화와 발걸음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온기가 머물러 있었지만,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현관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을 넘어서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인간의 상상이 닿지 않는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수평선 너머 태양이 떠오르자

순백의 대리석 도시가 거대한 보석처럼 깨어났다.


깎아지른 백색 절벽 위로 황금빛 돔 지붕들이 층층이 솟아 있었고,

거대한 회랑은 하늘에 길을 내듯 허공을 가로질렀다.


발밑의 물결은 지독하리만치 투명한 에메랄드빛이었으며,

수로를 따라 도심으로 흘러든 물은 인공 호수에서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조각상들과 어우러졌다.


엄마는 멍하니 서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돌다리 위의 만남


두 여인은 책을 들고 대화를 나누며 아치형 돌다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하얀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긴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짝였다.


정신없이 주변을 살피며 돌다리를 건너던 엄마는

마주 오던 여인 중 한 명과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엄마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통증이 느껴지자 평소 습관대로 곡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어후, 내가 무릎 수술을 해가지고... "


두 여인이 깜짝 놀라며 엄마를 부축해 일으켰다.

엄마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멍한 눈으로 물었다.


"아니, 근데 여기가 대체 어디에요?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밀밭 그림을 한참 보다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거든요.

그... 그런데 혹시 두 분은 천사예요?"


그러자 부딪혔던 여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죽어서 오는 데가 천국이지,

넌 아직 살아 있잖니.

아, 그리고 어디라고?

밀밭? 그 그림이 문제란 말이야..."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듣다 보니 상대방의 말투가 영 거슬렸다.


척 보기에 자기 딸뻘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가 아닌가.


"근데 저기요, 왜 이렇게 반말을 해요?

나이도 젊은 사람이.."


여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여인은 근처에 놓인 투명한 거울 같은 수면을 가리켰다.


엄마는 투덜대며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엄머머머머!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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