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어느 여름날의 숙취

by sl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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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드러나는 속 쓰림과 두통에 잠에서 깼다.

서서히 지나가는 기억들.

(하...)


괴롭다. 술은 늘 그랬다.

먹기는 좋고 후회만 남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방과 1년에 500파운드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 방은 오늘따라 너무 고요했다.


고요함이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

어젯밤의 나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난 그런데도 왜 자꾸 마실까.


때로는 이 원초적인 질문에

답은 있으면서 고여가는 기분만 든다.


아마 저녁즈음엔

내 속 쓰림도 후회도 지나가게 되겠지.


하지만 내 통증은

어제와 오늘의 형태가 다를 뿐


완전히 사라지지도,

영원히 머물지도 않게 될 것이다.




뭐 좀 먹어야겠다가도

배고픔과 속 쓰림에 물만 마셔댔다.

(하....)


아무도 없는 집은

그날따라 혼자 있기에 적막하기까지 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기분 나쁜 숙취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지난 배꼽시계에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물과 죽을 고르는 사이,

나는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엄마는 내가 아플 때마다 흰 죽을 끓여주셨다.


아프면 토하던 나에게 딱 맞는 죽이였는데

간장과 참기름을 섞은 게 추가로 필요했다.


맛있어?라고 엄마가 물으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숟가락씩 떠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엄마의 사랑 언어였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보다 더 확실한.





숙취엔 해장국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아픈 느낌이어서 죽을 선택 했다.


나름 전복죽과 쇠고기죽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떤 게 지금의 나에게 더 필요할까.


이런 작은 선택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면아이 치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신체적 신호를 존중하고,

자신을 돌보는 작은 실천에서 쌓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엄마처럼. 나 자신에게




오늘은 전복죽이다.

어제 먹은 게 고기여서.


전복죽 뚜껑을 열고 비닐을 약간 깐 다음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3분.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들어오는 손님들과 묘하게 섞이고 있었다.


울프는 런던 거리를 걸으며,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풍경을 세심하게 관찰했다고 한다.


나도 편의점에서 전자레인지에 죽을 기다리며,

내 삶을 잠시 세심하게 관찰해 보기로 했다.





어둑해져 가는 편의점 창문의 보는데

하루가 날아가 헛헛함마저 들었다.


3분이 지나자,

뜨거워진 첫 끼를 꺼내고 물을 마신 다음,

뜨거울까 입으로 불며 한입을 먹었다.


전복죽은 내 속을 달래 가며 조심히 들어왔고

나는 쓰라렸던 속만큼이나,

약간의 위로를 받았다.


이런 게 밥심인가,

나의 단순함인가.


괜히 우울해졌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어쩌면 치유는 이렇게 소박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고 주는 것.


때로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한 그릇 뚝딱 먹고 가려는데,

노을이 지는 어둑한 하늘에

약간은 여름밤같은 시원한 공기에,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울프는 고독이 창작과 자기 성찰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했다.


위대한 예술가나 사상가는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진리를 찾기 위해 고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나는 위대하지는 않지만,

이 고독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자기만의 방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그 자체가 방이다.





나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내 방으로.


내가 실수하고,

후회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공간으로.


반성 섞인 다짐으로

내일은 열심히 살아야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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