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풍경은 매년 조금씩 달랐지만,
90년대 내 크리스마스이브는 한결같았다.
거실의 고요함과 내 설렘만큼은 늘
변하지 않았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산타를 기다려야 했으니까.
거실 TV에선 '나 홀로 집에'의 익숙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케빈이 형의 방에서 잡지를 훔쳐보다 들키는 장면,
가족들과 싸우고 "가족이 다 사라졌으면 좋겠어!"라고 소리치는 장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말로 혼자 남겨진 걸 깨닫는 장면.
도둑들이 케빈의 집에 침입하려다
온갖 함정에 걸려 고통받는 장면
BB탄 총에 맞고 타르를 밟고
크리스마스 장식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들.
조 페시가 분한 도둑이 화를 내는 표정,
대니얼 스턴이 거미에 놀라 비명 지르는 장면까지
프레임 하나하나가 익숙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크리스마스이브를 채워주는 소리였고,
산타가 올 때까지 나를 깨어 있게 해주는 빛이었다는 것이다.
산타가 온다는 믿음, 그것만이 내 눈꺼풀을 버티게 했다.
나는 성인이 된 후에야
아픈 아이를 위해 엄마가 20시간 동안 온실에
라플란드를 꾸며주었다는 기사를 보고는
산타가 사는 곳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핀란드 라플란드 지역의 중심 도시,
로바니에미.
이곳은 북극권을 가로지르는
북위 66도 33분 선 위에 자리 잡고 있고
겨울철에는 극야 현상이 나타난다.
이 도시에는 ‘산타클로스 빌리지’라 불리는
관광지와 1985년 공식 등록된 ‘산타 우체국’이 있다.
매년 전 세계에서 수십만 통의 편지가 도착하며,
직원들은 실제 주소지에 따라 분류하고 기록한다.
마을에서는 산타클로스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근처 순록 농장에서는 북극 순록들이 썰매 체험을 준비한다.
요정 복장을 한 스태프들도 선물 포장과 안내 역할을 맡는다.
이 모든 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운영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록 내가 상상했던 방식은 아니였지만.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참아야 했다.
산타를 놓칠 수 없었다.
혹시 산타가 오는 순간을 목격하면 어떨까.
하얀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빨간 옷을 입고
굴뚝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모습.
우리 집은 굴뚝 대신 베란다 창문만 있었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산타는 어디든 들어올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가졌을 테니까.
라플란드에는 '톤투'라는 작은 요정들이 산다는 전설이 있다.
핀란드어로 '톤투(Tonttu)'는 집을 지키는 정령을 뜻한다.
빨간 모자를 쓰고 긴 흰 수염을 기른
이 작은 존재들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 집안일을 돕고,
가축을 돌보고, 때로는 장난도 친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톤투들은
산타의 일손이 되어 전 세계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한다고 했다.
눈은 계속 내렸다.
창밖 세상이 점점 하얗게 물들어갔다.
혹시 저 눈이 내리고 있는 어딘가에서
선물 자루를 메고, 순록을 이끌고
산타가 우리 집을 향해 오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산타가 보기에 내가 자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으니까.
착한 아이만 선물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언젠가부터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케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침이었다.
머리맡, 바로 그곳에 선물이 놓여 있었다.
은빛 종이로 포장된 상자 하나.
심장이 쿵쾅거렸다.
산타가 정말 왔다 간 거다!
내가 자는 동안에.
"엄마!" 나는 침실로 달려갔다.
"산타 왔어? 봤어?"
엄마는 눈을 비비며 웃었다.
"엄마도 자고 있어서 못 봤어."
아쉬웠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산타를 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동시에 확신이 들었다.
진짜 산타가 온 것이다.
산타 마을에서,
여덟 마리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이곳까지 날아온 거였다.
루돌프의 빨간 코가
눈 내리는 밤하늘을 밝히며.
창밖을 보니 눈은 그쳤지만,
세상은 여전히 새하얬다.
마치 산타가 지나간 흔적처럼.
그날 나는 무슨 선물을 받았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생각을 했었다.
혹시 산타가 아직 근처에 있을까.
혹시 순록들이 눈 속에 발자국을 남겼을까.
내년에는 깨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다짐했다.
내년에는 꼭 산타를 보겠다고.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지역에서는
톤투라는 작은 요정들을 위해 현관에 우유 한 그릇을 놓아두는 전통이 있었다.
이는 톤투가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게 해 주고,
가족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엄마가 말했다.
산타는 아빠였다고!
선물은 아빠가 준거라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진짜 산타가 있을 거라고 우겼다.
엄마와의 산타토론은 내가 무조건 지는 게임이었다.
그 밤, 나는 마법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작은 요정들을 위해
현관에 놓인 우유 한 그릇과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