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시장을 지나가면
내가 살던 동네가 보인다.
살던 동네가 버스 한 번으로 갈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큰 변화 없이 남아 있는 골목들은
마치 시간을 붙잡아두는 손처럼 느껴졌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면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하나씩 깨어난다.
이곳은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 같은 곳인데,
특이하게도 장소와 연결된 기억을 아주 강하게 저장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장소 세포'라고 부르는데,
2014년 노벨상을 받은 발견이다.
익숙한 장소에 가면 뇌의 해마가 활성화되면서
그곳에서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연쇄적으로 떠오른다.
마치 오래된 서랍을 열면 그 안에 담긴
물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처럼.
내가 놀이터 벤치에 앉았을 때,
뇌는 실제로 과거로 '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리적 시간여행은 아니지만,
신경학적으로는 진짜 시간여행이나 다름없다.
그 아이와는 학교 끝나고 자주 놀았다.
동생네 집 앞 계단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렸다.
이 놀이터에서 다람쥐통에 들어가 노을이 지는 걸 봤다.
친구랑 함께 들어가면 더 비좁았지만 그게 좋았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또는 등을 대고 앉아서 밖을 내다봤다.
다람쥐통 틈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좀 달랐다.
해가 지면 그 사이로 노을빛이 들어왔다.
오렌지색, 분홍색, 보라색. 색깔이 계속 변했다.
우리는 말없이 그걸 봤었다.
맞다.
학교에선 토끼를 키웠다.
아이들은 토끼를 보러 갔었다.
어디서 풀을 가져와 주기도 했다.
이 시기의 기억이 유독 선명하고 많이 떠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시기에 뇌의 신경가소성이 가장 활발하다.
새로운 경험들이 뇌에 깊게 각인된다.
둘째, '처음'의 경험들이 많은 시기다.
첫사랑, 첫 우정, 첫 배신. 뇌는 '처음'을 특별하게 기록한다.
이런 경험들은 뇌의 특별한 서랍에 보관되어 있다가,
그 장소에 가면 자동으로 열리는 것이다.
나는 그저 벤치에 앉아 있을 뿐인데,
뇌는 수십 년 전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는 가끔 이 동네가 없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오래된 동네들이 하나둘씩 재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괜히 불안해진다.
이 동네도 언젠가 그렇게 될까 봐.
힘들 때 그곳에 앉아 있으면 어릴 적
생각도 나고 편해지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서 생긴 복잡한 감정들,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관계에서 오는 피로함.
그런 것들이 이곳에 오면 잠시 멈춘다.
여기서는 그냥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
아무 걱정 없던,
내일이 두렵지 않던 그때의 나.
내가 도망칠 수 있는 나의 안전구역.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오래된 동네일 뿐이겠지만,
나에게는 치유의 공간이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할 때,
이곳만은 그대로 있어 준다.
해가 늦게 지는 바람에 어둑하지는 않지만
노을이 질 것 같았다.
하늘이 조금씩 색을 바꾸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는
뇌에 '안전함'이라는 감정과 함께 저장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편도체가 활성화되면서
불안이 커지는데,
익숙하고 안전한 장소에 가면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전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되면서 편도체를 진정시킨다.
이건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실제 뇌 화학의 변화다.
내가 그 놀이터 벤치에 앉으면,
뇌는 "여기는 안전해"라는 신호를 보낸다.
코르티솔이 줄어들고 세로토닌이 증가한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치유의 공간.
그래서 나는 힘들 때마다 이곳으로 온다.
버스 한 번이면 되는, 나만의 치유소.
아마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음악이 있으면 평범한 산책도 특별해진다.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모든 순간이 의미 있어 보인다.
그날이 그랬다.
놀이터에서 나와 위로 올라가면 아주 오래된 미용실이 있다.
이 간판이 레트로다.
여전한 미용실 간판이 좋았다.
건너편엔 같은 반 친구였던 아이의 집인데,
여름쯤 담장에 장미넝쿨이 인상적이었다.
그 집에 놀러 가고 한참 동안 엄마에게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장미가 얼마나 예쁜지,
집이 얼마나 멋진지,
친구 엄마가 얼마나 친절한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엄만 지겨웠는지 듣기 싫다고 했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보편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강한 중력장에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행성에 잠깐 갔다 온 주인공이 우주선에 남은 동료보다 훨씬 젊은 이유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또 다른 '시간의 상대성'이 있다.
물리적 시간이 아닌, 체감 시간의 상대성.
그 오래된 미용실 간판은 나에게
'시간이 멈춘 공간'을 선물한다.
물리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실제로 일어나는 시간 정지다.
뇌는 변화를 감지해서 시간을 측정한다.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 안 갔다'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변하지 않은 동네를 걸으면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 방 창문도 보였다.
나는 저 창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학교 갈 준비를 하면서, 숙제를 하면서, 친구와 통화하면서.
지금은 다른 사람이 그 방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도 이 방이 특별한 공간일까.
달라진 게 거의 없다.
계단 페인트가 조금 벗겨진 것 말고는.
대문도 그대로, 계단도 그대로, 지붕도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이 집도, 이 골목도, 이 놀이터도 언젠가는 없어질 수 있다.
그래서 올 때마다 더 오래 보게 된다. 마지막인 것처럼.
각 지층은 다른 시대를 담고 있다.
우리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fMRI 연구에 따르면,
같은 장소의 기억을 떠올릴 때
뇌의 여러 시간대 기억들이 동시에 활성화된다고 한다.
2층 집 창문을 볼 때,
내 뇌는 초등학생 때의 나, 중학생 때의 나, 고등학생 때의 나를 동시에 불러낸다.
물리학에서 '중첩'이라는 개념이 있다.
양자역학에서 입자는 여러 상태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내가 그 창문을 볼 때,
여러 시간대의 '나'가 중첩되어 존재하는 셈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공간에서 만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시간여행이 아닐까.
구두를 신어서인지 발이 조금 아프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지나가는 차들을 보는데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왔다.
아까까지의 따뜻함은 어디로 갔을까.
추억을 되짚는 동안은 좋았는데.
시간여행은 끝났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갔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때문이다.
모든 것은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시간의 화살'이다.
내가 느낀 공허함은 이 법칙을 본능적으로 아는 데서 왔을 것이다.
그 동네는 지금은 남아 있지만,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2층 집도, 미용실 간판도, 놀이터도. 시간은 앞으로만 간다.
하지만 신경과학은 위안을 준다.
내 뇌 속 해마에는 그 동네가 영원히 보존되어 있다.
물리적 공간은 사라질 수 있어도,
신경학적 공간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존재한다.
진짜 시간여행은 기계가 아니라 기억 속에 있다.
버스가 왔다.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여행은 내 뇌 속 어딘가에 새로운 지층으로 쌓일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그곳을 찾을 때,
오늘의 나도 함께 떠오를 것이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공허함을 느꼈던 어느 날의 나.
그렇게 시간의 지층은 계속 쌓여간다.
시간여행자는 결코 외롭지는 않다.
과거의 자신들이 함께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