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어느 마을의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은 앞집과 뒷집.
비좁은 땅을 나누어 가진 두 집 사이에는 동백나무 그루가 있었다. 야생으로 뿌리를 내렸는지, 누가 일부러 심었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사시사철 항상 그 자리에서 커가고 있었다. 몇 년 사이 키가 부쩍 자란 동백나무에서는 철따라 빨간 동백꽃이 예쁘게 피어났다. 아름다운 자태가 앞집 뒷집 사람들의 눈 안에 모두 들어오니 그들의 마음 또한 꽃마음이 되어 흐뭇함으로 가득했다.
어느 해, 앞집에서 집 주변 미화 작업을 하느라고 집 둘레에 돌담을 쌓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작은 제주 돌로 야트막하게 쌓아 올린 보잘것없는 돌담이었다. 앞집 땅 가까이에 뿌리내린 동백나무는 자연스레 담 안으로 들어왔다.
그 후로 뒷집에서 불만의 소리가 전해져 왔다. 담이라는 장애물이 생겨 동백나무와 더 이상 친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얕게 쌓아 올린 담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다소곳이 서있는 벚나무와 동백나무로 향하는 시선을 방해하지 않았다.
사계절 그 한자리에 서있으면서 봄날엔 초록 잎이 부드러운 아침햇살을 받으면 보송보송 반짝이고 겨울에는 가지마다 소복이 쌓인 백설이 하얀 눈꽃을 만들어주어 우리의 빈 마음을 채워주던 고마운 동백나무였다. 늘 같았던 거리가 시야의 장막이 될 수도 없었고 야트막한 담에 가려진 나무 밑동 부분이 꽃의 감상을 해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만의 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뒷집 앞마당 둘레에는 크고 작은 관엽수며 꽃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많은 꽃들만으로는 감상의 영역이 좁아서였는가, 아니면 꽃에 대한 사랑이 과해서였을까.
살아 숨 쉬는 생명, 만인이 사랑하는 꽃. 그 자연의 신비에 감사해야 하건만 우리의 감각기관이 점점 무뎌져서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의 순수한 참모습에도 사랑과 진실을 담지 못하는 우리의 좁은 소견이 마음을 슬프게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마음의 철책에 갇혀 자신을 가두고 움츠려 살고 있다. 서로를 견제하면서 마음을 교란시키고 불안과 초조의 덫에 걸려 있는 우리는 먼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안목만 갖고 있다. 그 우매함으로 인해 인간은 항상 자연의 힘 앞에서 불안해하며 맞서려는 초라한 모습으로 남는 것이리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불평 없이 살아가는 식물은 사람보다 한 차원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길가에 무심하게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을 볼 때마다 발길이 멈춘다. 더구나 나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철마다 곱게 피고 지는 꽃나무에게는 더욱 애정이 간다. 한 겨울 추위에도 묵묵히 뒤뜰 한구석에 서 있는 동백나무는 한솔 밥 먹고사는 식구처럼 사랑스럽다. 찬바람이 몸통을 휘감아도 가지마다 동그란 둥지를 지어 새빨간 꽃잎 살포시 올려놓는 동백나무. 화신풍 불어오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예쁜 꽃 피워 동박새를 유혹하는 동백나무. 어떤 소요에도 아랑곳없이 의연하게 한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푸른 상록수 동백나무.
당신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자연의 품에서 피어나는 고귀한 생명체입니다.
우리 곁에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산방한담(山房閑談)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