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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민아 Jul 16. 2018

매실 이야기


몇 개월 만에 제주 집을 찾았다.     

           

일 년에 두세 번 밖에 오지 않기에 집에 들어설 때마다 낯가림하는 애기처럼 한참을 낯설어한다. 마당 한켠에 심어놓은 일 년 초 꽃들, 철따라 피는 꽃나무도 봄 여름 가을 없이 무심히 피었다가 외롭게 지고 만다. 이른 봄 화려하게 차려입은 매화 철쭉 벚꽃, 5월의 오만한 꽃 빨간 장미도 눈 맞추며 보아주는 이 없이 으레 혼자 피고 혼자 진다. 드문 방문길에 무정한 주인과 우연히 마주치면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어준다. 하지만 그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또 헤어져서 먼 곳에 떨어져 살아야 한다. 


올해 6월, 운 좋게 서로의 만남이 일치하는 행운의 날을 맞았다. 정원 뒤뜰 구석진 한켠에서 무던히 자란 키 작은 매화나무 한그루와 오랜만에 상봉을 했다. 초봄에 진한 향기와 함께 예쁘게 피었을 매화꽃의 고운 자태는 이미 사라졌지만 그 꽃자리에 탄탄하게 영근 매실 열매가 알밤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우리는 생각지도 않던 뜻밖의 수확에 환호하며 어서 매실주와 매실청을 담가야겠다고 신이 나 있었다. 계절이 비껴가도 발걸음 한번 않다가 신록이 가득한 날이 되어서야 손님처럼 찾아온 우리 부부에게 잠잠히 집을 지켜준 매실나무는 한아름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우선 매실을 거두는 일에 돌입했다. 손이 닿을 만큼 얕은 가지에 달린 매실은 거뜬히 딸 수 있었지만 높이 뻗은 가지에 매달린 매실을 따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긴 막대기와 갈퀴 등 가장 기다랗고 튼튼한 도구들을 동원해가며 한 개라도 더 따려고 안간힘을 썼다. 까치발을 들어 가지를 움켜잡고 촘촘히 붙은 청매실을 후두득 한 번에 흝어내리기도 하고, 한 톨이라도 놓칠세라 온몸의 힘을 빌어 전력을 다하며 나무를 두들겨 패고 마구 흔들어대기도 했다. 그 억척스러운 성화에 견디다 못한 매실나무는 결국 알토란 같은 자식 모두를  내어주고 말았다. 덕분에 나무 밑은 온통 청매실 밭이 되었다.


우리로서는 한껏 입이 벌어지는 횡재의 기쁨이었지만 매화나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고고하고 청초한 얼굴을 내밀며 짙은 향내를 발할 때 와서 보아주고 칭찬해 주실 것이지, 이제야 나타나서 열매만 거두어 가시나요 하는 원망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의 탐욕과 훼방 없이 땅에 떨어져 하나의 씨앗으로 묻혔다면 그 자손이 대를 이어 다복한 매화 가족을 이루고 한생을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열매가 되기 전 아름다운 꽃으로 와서 감성 가득 온화한 기운을 주었고, 꽃의 영광이 시들고 나면 인간에게 식재를 공급하여 후덕하게 보시해주는 매화나무의 꽃과 열매에게 숙연히 머리가 숙여졌다. 


떨어진 매실들을 큰 바구니에 하나 가득 꾹꾹 눌러 채워서 낑낑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우선 병색이 짙은 매실은 골라내고 깨끗이 씻어서 물기를 제거한 다음 매실청 담그는 작업에 들어갔다. 아침 산책길에 들른 마트에서 구입한 흰 설탕과 황설탕 2kg, 소주 한 병을 각각 준비했다. 눈여겨보아 두었던 앞마당에 진열된 빈 항아리 중 적당한 크기의 것을 골랐다. 몇 년 동안 방치되어 비바람 맞고 흙먼지를 쓴 오지 단지를 안으로 들고 와 묵은 때를 말끔히 벗겨 씻어놓으니 반짝반짝 광이 났다. 텅 빈 채로 우두커니 밖에만 서 있어서 본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인데 이제 내용물이 가득 채워지면 제 쓰임새를 발휘하게 될 거라고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매실청 담그는 수순을 밟는다. 냄비에 소주와 설탕을 넣은 뒤 한소끔 끓여 식혀 놓았던 희석물을 항아리 밑바닥에 부었다. 그 위에 매실 한켜 설탕 한켜 씩을 차곡차곡 쌓았다. 매실이 점점 항아리 목줄까지 올라오면서 오지 단지 안은 담근 김장김치처럼 틈새 없이 매실로 가득 찼다. 끝 마무리로 맨 위에 설탕을 듬뿍 올리고 랩으로 항아리 아구리를 막고 뚜껑을 닫았다. 


매실청 만들기는 일단락 지었으나 다음으로 남편이 좋아하는 매실주를 담가야 한다. 평생 술 사랑에 빠져 사는 그는 매해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매실주를 담근다. 매실주를 담그는 과정은 매실청과 달리 매우 수월하다. 항아리에 매실과 담금주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넣고 뚜껑을 닫으면 끝이 난다. 오늘 우리 부부가 온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놓은 매실청과 매실주가 몇 개월 후 어떤 모습으로 숙성되어 우리의 입맛을 돋우어 줄지는 미지수지만 설렘과 기쁜 마음새로 기대해 본다. 


우리는 해가 훨씬 짧아진 11월쯤 이곳 제주에서 연중행사로 열리는 방어축제에 즈음하여 다시 올 것이다. 비록 초봄에 곱게 핀 매화꽃은 보지 못했지만 동글동글 매달린 알토란 매실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함빡 웃던 그 웃음이 맛 좋은 매실청으로 이어져 혀가 호강할 그날을 상상해 본다. 벅찬 마음과 염려스러움이 엇갈리면서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볼 때 “야, 성공이다!” 또는 “아이구, 실패했네.” 의 두 갈림길 중 어느 쪽일지 두근두근 기다려 봐야지. 우리 부부의 손으로 성심껏 담근 매실청과 매실주가 일 년 내내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효자 음료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올해 6월, 정원 뒤꼍에 서있는 매화나무가 생각지도 않았던 복덩이 열매를 제공해서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었다. 내년 봄에는 홀로 외롭게 꽃을 피우지 않도록 옆에 함께 있어주며 꽃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한다. 봄바람에 매화향기 그윽하게 일렁일 초봄 어느 날을 잡아 이곳 제주에 내려와서 매화나무 아래 돗자리 깔고 앉아 담가놓은 매실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매화와 노닐어야겠다. 매실주가 싱거우면 도수가 높은 소주를 희석해 한잔 들이키고 거나하게 취해서 매화 시 한 수 읊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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