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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미 Sep 15. 2020

내가 죽었을 때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를 부르는 호칭은 많았지만, 이름이랄 건 없었다.     


  그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형의 이름으로 불렸다. 어린 시절에 그를 본 어른들은 그를 상수라고 불렀다. 그는 죽은 형 대신 족보에 올라가야 했다. 형의 이름 상수에 돌림자를 쓴 이름인 이상식. 이씨 족보에서 그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아들이 죽은 형 그늘에서 살아가는 게 못내 미안했던 그의 어머니는 10살이 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동렬. 그럴듯한 한자만 가져다 쓴 뜻 없는 이름이지만 그는 기뻤다. 상수와는 전혀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생겼을 뿐인데, 그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분명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은 동렬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19살 그가 받은 주민등록증에 적혀진 이름은 동열이었다. 열과 렬. 어쨌든 같은 한자를 썼으니 같은 이름이라지만, 두음법칙을 쓰면 결국 같은 이름이라지만, 동열과 동렬은 달랐다. 리을에 여, 그리고 다시 리을. 이름이 생긴 이후 그에게 생긴 취미는 이름 쓰기였다. 모든 물건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복잡한 획순 하나하나 힘을 주며 써내려가는 그 과정을, 그는 사랑했다. 14획이나 되는 그의 이름을 쓰는 과정은 태어난 지 10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 지난한 과정 같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얻은 자신만의 이름은 너무도 특별했다. 그러나 그 특별함은 그에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렬이 열이 되는 것은 너무도 쉽고 허무했다. 이름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쉽게 만들 수도, 쉽게 바뀔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인이 된 그가 이름으로 불릴 일은 많지 않았다. 성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이름 대신 새로운 호칭을 받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성인이 되면서 수많은 새로운 호칭을 받았다. 대학생 시절 그는 학회장으로 불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갔더니 그는 막내가 되었다. 막내에서 벗어나 대리로 불렸을 때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사장님이 되었다. 결혼을 했더니, 남편이 되었고, 이 서방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다. 그는 상황에 따라, 장소에 따라, 때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가끔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들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가 이름으로 불릴 일은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갔다. 저번 달에 봤을 때는 다 깨진 휴대폰 액정으로 딸내미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던 녀석이었는데, 한 달 만에 영정 사진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술 내가 살 걸. 영정 사진 아래 손 글씨로 적힌 문구가 보였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김상호.’ 나는 죽어서 뭘로 불릴까. 나는 지금까지 무엇으로 불렸던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참을 생각한 그는 자신이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내 억울했다. 이름이라고 해봤자 다른 호칭들과 다를 게 없었다. 가족 어른들 앞에서는 상수, 친구들에게는 동렬, 공문서나 명함에 찍힌 이름은 동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름은 사회생활을 하며 얻은 호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이름 대신 불러달라고 했던 호칭조차 남이 만든 것이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살았고, 이름도 아닌 호칭으로 불렸으니 죽은 뒤, 아니 이제라도 내가 듣고 싶은 이름을 들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위해 이름을 지었다. 피리가락 고를 홀. 평안할 은. 몇 날 며칠 한자 사전을 붙들고 고생해서 겨우 맘에 들게 지은 이름이었다. 좋아하는 악기를 불면서 평안하게 살고 싶다는 그의 꿈을 한가득 담았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는 노트 표지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냉장고에도 자신의 이름을 쓴 종이를 붙였다. 처음 이름을 받았던 10살 때처럼 그는 모든 물건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홀 은.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득한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모바일 메신저의 프로필 소개란을 채웠다.     


‘홀은. 피리 불며 평안하게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니 홀은 선생은 메신저 프로필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메신저 창을 닫았다. 창틀 위에 놓인 화분 속 새싹에서 떡잎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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