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경, 동대문 종합시장에 없는 부자재를 구하기 위해 신설동으로 가야 했다. 4호선 동대문역에서 불과 두 정거장 거리. 서둘러 4호선 내에 1호선 라인으로 환승했다. 계단으로 빠르게 내려와 바로 앞 플랫폼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곧이어 들어오는 지하철을 탔는데, 뒤통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송해네!"
"맞네! 송해 오빠!"
문 앞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나는 '송해'라는 한마디에 몸을 돌렸다. 진짜다! <전국 노래자랑>의 명 MC 송해 선생이 노약자석에 계셨다. 소란스러운 주변의 반응과는 상반되게 두 눈을 감고 편안한 표정으로 흡사 주무시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계셨다면 싸인 요청이라도 했을 텐데 목적지까지 짧은 이동 시간과 선생께서 고요히 쉬고 계신 모습에 2m 안팎에 있던 대스타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패션쇼를 관람하러 갔을 때나 드라마 촬영지를 우연히 지나가는 경우 등 엉겁결에 유명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말로만 듣던 대중교통을 타는 스타라니, 그것도 코앞에서 만나고 보니 찰나의 순간에도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전국 노래자랑>의 사회를 보는 MC 송해 / 이미지 출처: 구글 -
송해. 대한민국 현존하는 최고령 연예인으로 그 이름 앞에는 '국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KBS의 최장수 프로그램 <전국 노래자랑>의 MC로 유명해 널리 알려져 있다. 실은 가수, 배우, 코미디언, 라디오 DJ 등을 두루 거쳐온 만능 엔터테이너로 말하는 게 더 적합하다.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한 그는 2021년 현재 만 나이 93세다. 흔히 "낼모레 마흔이야~"라는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농담도 곧 있으면 100세를 앞둔 그에겐 감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조크다.
둥글둥글하고 다부진 몸에 장난스러운 아이 같은 천진함과 온화한 미소를 함께 가진 외모. 구성진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말씀하시는 모습은 인공미(人工美)에서 느껴지는 거북함이 없다. 1955년 악극단 가수로 데뷔해 올해로 66주년을 맞이 한 그야말로 베테랑 예인(藝人)이라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연기일 뿐이라면 시기상의 문제지 언제고 본심이 탄로 날 일이 있었을 것이다. 반세기를 훌쩍 넘기는 세월 동안 우리네 마음에 자리 잡은 송해는 옆집 오빠였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였으며 막막한 길에 지혜를 여쭙는 어르신을 대신하는 유일무이 한 존재로 대표되었다.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용모와 다르게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다. 해방 후 6.25 전쟁이 발발하고 1.4 후퇴를 겪는 과정에서 가족과 떨어져 혈혈단신 피난길에 올라 남녘으로 오게 된다. 잠시 전쟁이라는 얘기치 못 한 큰 사건으로 인한 짧은 이별이라 여겼지만 이후에 한반도는 38선이 그어지며 분단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장벽은 그가 90세 넘은 노인이 되어서도 혈육을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멍에를 지게 만들었다.
집도 절도 없는 실향민. 의지 할 피붙이 한 명 없는 타향살이는 설움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반드시 고향의 어머니와 형제를 만날 미래를 꿈꾸며 버텼다. 가진건 몸이 전부였다. 다행히도 그는 노래에 재능을 타고나 북에 있을 때 해주예술전문학교 성악과에서 수학하고 기예를 닦는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재산으로 내재된 능력은 피난민에서 악극단 가수로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수입은 일정치 않아 늘 곤궁한 살림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아지지 않는 삶이 힘겨워 절벽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려 한적도 있었다. 천만 다행히 나무에 걸려 목숨을 부지하게 되면서 그는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 깨닫게 된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심기일전 한 그때, 송해의 무대를 좋게 봐준 사람으로 연이 닿아 텔레비전에 진출한다. 갈고닦은 내공이 비로소 세상 속에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7년 그의 아들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교통방송 라디오 DJ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며 매일 안전운전을 말하던 송해였다. 그런데 아들이 20대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다니 억장이 무너졌다. 이제 수입도 안정되어 가정을 건사하고 행복하게 살 날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렸다. 이 원통한 마음을 어찌 남이 헤아릴 수 있을까? 갖은 고생을 하고 살아왔는데 부모로서 자식의 죽음을 먼저 보게 되는 아픔이 찾아왔다. 인생의 숱한 고비를 겪은 그였지만 만에 하나라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이 시련은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들을 잃고 난 후에 그는 인기 정상에 있던 라디오 DJ를 그만둔다. 실의에 빠진 송해에게 천운(天運)의 제의가 들어오는데, 대한민국 신바람의 주역이 된 <전국 노래자랑>의 MC였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섬이나 산촌을 순회하는 촬영 장소는 그 시대 서민 곁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국민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옛날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꿈같은 얘기였다. 지금이야 기술과 기기의 발달로 플랫폼이 다양화돼 1인 방송은 물론, 여러 창작 활동을 세상에 자유롭게 선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 미디어는 특정 집단에 소유로 선택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포되었다. 소싯적에 개인의 끼를 방출하는 창구가 있었다면 '재롱잔치'나 '학예회'정도랄까? 무대에 오르는 기회도 이렇듯 흔치 않은데 방송에 나온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전국 노래자랑>이 가지는 남 다름은 한국인의 해학과 풍류를 계승한 현대판 마당놀이라 하겠다.
- (좌측부터) 특산물인 문어를 들고 나온 출연자, 벌 때와 함께 나온 양봉인 출연자, 최연소 3세 출연자 / 이미지 출처: 영상 캡처-
최연소는 3세 최고령의 출연자는 103세 할머님으로 방대한 나이의 분포만큼이나 출연 이유도 다양하다. 내 고장에서 직접 생산하는 특산물의 홍보를 위해서나 흔치 않은 장기를 자랑하기 위해 또는 가수나 연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중파 방송 무대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래전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방송의 힘을 빌고자 나오는 등 저 마다 사연이 있다.
지금까지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것은 단연 MC 송해의 공로가 크다. 그가 출연자와 제작진과 함께 만들어낸 호흡은 전파를 타고 전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브라운관 넘어 울고 웃기는 평범한 이웃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현실에 녹록지 않는 시련을 잠시나마 털어 버릴 수 있었다. 한바탕 시원하게 노래 한 소절 따라 부르고, 어깨를 들썩이며 막춤을 추는 모습은 이것저것 잴 것 없는 편안함이었다. 방송 출연이 전무한 일반 시민들이 카메라 앞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량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사전에 일일이 방문해서 출연자를 독려했던 송해의 든든한 배려가 있어 가능했다.
- <전국 노래자랑> 시청자 게시판 캡처. 위의 캡처본과는 다른 인물이 작성한 글이다. -
1980년 11월에 시작한 <전국 노래자랑>은 올해로 41주년을 맞이 한다. 20년 넘게 사회를 보는 송해를 향해 지나친 독식으로 후배들의 앞길을 막는다는 말이 있다.이것을 추악한 노욕이라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그는 전국 노래자랑 MC에서 일찍이 하차한 바 있다. 1988년 5월부터 시작해 1994년 4월까지 약 6년 동안 진행한 뒤의 하차였다. 이후 kbs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전국 노래자랑> MC가 바뀐다. 그러나 갈수록 떨어지는 시청률과 시청자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이례적으로 6개월 만에 다시 재진행을 맡게 된 것이다. 계속 고사하는 송해를 제작진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송해 = <전국 노래자랑>. 대체 불가가 되어 버렸다. 또한 인간 송해의 삶에서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아들을 잃고 인생의 가장 힘든시기를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며 가진 시청자들의 만남과 대화 속에 그 자신이 치유받았다. 오랜 세월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한 시청자와 송해는 이미 참다운 벗이었다.
<전국 노래자랑>을 두고 구시대 유물로 폐지를 주장하는 동시에 MC 송해를 통해 노인 비하를 서슴없이 질러대는 추악한 글을 마주 할 때가 많다. 그들은 말한다. '노인 내 냄새나는 프로그램 대신 전체적으로 공감 갈 수 있걸 만들라고'. 이건 마치 < 6시 내 고향>에 '촌발' 날린다며 폐지를 운운하는 모양새다. 그들은 애초에 <전국 노래자랑>이 기획된 근간을 전혀 보지 않은 것이다.
악플러가 말하는 짜증 나는 늙으니 냄새를 왜 나는 맡을 수 없을까? 오히려 그들의 무논리적 악담 퍼레이드로 채워진 글은 여지없이 심한 악취가 풍긴다. 핫하고 대중적인 방송만을 추구한다면 당장의 인기와 금전적인 이득을 채울 수 있어 방송사는 손해가 없다. 하지만 점점 사회에서 소외되는 노인을 위한 <전국 노래자랑>과 같은 프로그램을 존속시키는 것 이야말로, 소수를 배려하는 동시에 천편일률적인 방송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지키려 하는 방송국의 노력이다. 긴 세월의 담금질을 통해 <전국 노래자랑>은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보존해야 하는 가치는 충분하다.
- < 부캐릭터 선발대회 > 포스터 / 이미지 출처: 구글 -
- '부캐' 아리송해의 프로필 사진. 깜찍한 포즈와 빈티지한 워싱의 청재킷이 너무 잘 어울린다. / 이미지 출처: 구글 -
2020년 전 세계를 팬데믹 공포에 빠뜨린 코로나 19로 인해 2월부터 <전국 노래자랑>의 예심과 녹화가 잠정 중단되었다. 대면으로 진행하고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이는 만큼 지역 확산을 우려한 조치였다. 매주 어김없이 안방극장을 찾아오던 '일요일의 남자' 송해도 프로그램과 함께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오랜 시간을 시청자와 같이한 사람 같은 간판 프로의 제작 공백은 이전의 영상을 재방송하며 팬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 주고 있다.
공식적인 대외 활동이 없어진 송해를 염려하는 팬들에게 깜짝 희소식이 들렸다. <부 캐릭터 선발 대회>의 20대 신인(?) 'MC 아리송해'라는 *부캐로 파격 변신을 한 것이다. 여태껏 그가 해 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으로의 승선이었다. 국민 MC 송해의 등장은 현재 트렌드에 맞춰 제작된 콘셉트를 잘 반영하며 프로그램의 화제성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진 요즘 예능에 연세 높은 어르신도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언젠가부터 오래되고 나이 든 것은 고루하다는 관념이 그것을 만들어가는 이에게도 유효하게 이어졌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100세를 넘긴 요즘 '정년'을 논한다는 게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오래된'것에 가진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방송을 종횡무진하는 현역 송해의 행보가 주목되며 마음 깊이 응원하게 된다.
*부캐: 본래 게임에서 사용되던 용어로, 온라인 게임에서 본래 사용하던 계정이나 캐릭터 외에 새롭게 만든 부캐릭터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후 일상생활로 사용이 확대되면서 '평소의 나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이나 캐릭터로 행동할 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청바지를 여미는 버튼( button). 캔톤이라고도 불린다. '스타'인 송해 선생이 떠오르는 별이 양각된 버튼 -
- 버튼이 달린 (좌) 앞면과 (우) 뒷면.-
버튼(button)은 청바지의 지퍼 위 앞섶을 여민다. 원형의 납작한 캡의 중앙을 단추 기둥이 받쳐주는 형태다. 데님 원단을 사이에 두고 앞쪽은 버튼이 뒤쪽은 버튼을 고정하는 핀이 달려 지지한다. 옷이 완성되는 마지막 공정에 부착되며 원형의 기본 모양 안에서 다양한 색이 있다. 양각과 음각의 형태로 문자나 도형을 새기기도 하고 반짝이는 크리스털 장식을 넣기도 하는, 디자인의 요소이자 브랜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옷과 신체의 중심에 위치한다.
청바지에 축을 만들고 기준이 된 버튼처럼 인간의 마음에도 중심축이 필요하다. 내 마음이 활동하는 한가운데를 회전하는 기준점. 중심의 위치와 흔들림 없는 힘의 유지가 관건이다. 사람은 가치관을 통해서 삶의 기준을 만들어 간다. 어떤 일이 벌어 질지 모르는 인생길은 처음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저 순탄할 수도 때론 모진 풍파만을 수 없이 겪어 낼 수 도 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한 번뿐인 인생,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냐며 한탄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삶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보다 깊은 지하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질을 당했다고 해도 절망하며 포기하기엔 인생이 길다.
전쟁을 겪으며 이산가족의 기약 없는 헤어짐을 안았고 한 번의 자살시도와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아픔들로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송해. 사람들이 그를 보며 힘을 얻는 것은 남부럽지 않은 유명세와 국민 MC의 타이틀 때문이 아니다. 견디기 힘겨운 순간을 끝까지 버티며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 낸 그의 삶의 기준에 보내는 찬사다.
고비의 순간은 있을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인생을 지속하는 방향을 택했던 중심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길로 기꺼이 나아갈 힘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