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건너는 눈, 나를 향한 창
아주 먼 옛날,
창문은 단지 통풍과 배출을 위한 구멍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창을 통해 나쁜 기운이 들어올까 두려워,
바깥을 바라보는 것조차 꺼리곤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세상은 달라졌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시선이 열리면서
창문은 **내다보는 눈**이 되었다.
밖에서는 건물의 얼굴이 되고,
안에서는 빛과 풍경을 끌어들이는 액자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창문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와 자동차, 더 나아가 비행기 창을 통해 본
풍경은 단순한 ‘보기’를 넘어,
속도와 함께 스쳐가는 새로운 시각 경험이 되었다.
‘본다’는 행위가 이토록 확장된 것은 창문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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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은 단순히 바깥을 ‘보는’ 기능에 그치지 않았다.
공기를 들이고, 빛을 받아들이며, 속도를 동반한 풍경을 스쳐가게 만들면서
결국은 시각·청각·촉각을 아우르는 공감각적 통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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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일도 이 창문과 닮아 있다.
처음 고객은 스스로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쌓이면,
만족감과 자신감이 서서히 차올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 겹 더 깊어진다.
겉모습을 넘어
내면까지 함께 다듬어가는 과정을 보내며,
‘내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나만의 창문도 덕분에 서서히 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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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도쿄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후쿠오카로 이주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일을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 선택.
선택의 기준은 나의 온전함을 볼 기회 찾기였다.
“생활인으로서 일본에서 자립 생활을 해 보자 “
도쿄에서는 일만 하다 보니,
정작 내가 일본에서 살았다고 할 만한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후쿠오카에서는 일보다 “생활”을 우선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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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한가한 시간에 해 보고 싶었던 것 해보기.
그중 하나가 ‘일찍이 요리사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 추적해 보기^^
그래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식 가정식, 프랑스 요리, 중국 약선 요리까지.
시간과 돈이 여유로워지면 나는 분명 미식가 될 거라 믿어왔기에
파인다이닝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레시피를 탐험했다.
그렇게 3년쯤 지나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먹는 걸 그리 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요리의 세계는 넓고 깊었다^^
미각과 장식을 익혀 의식을 올려보고 싶었으나
손이 많이 가는 요리에 대한 매력은 호기심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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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많이 가야 하는 요리는 가끔이면 충분하다.
요리를 하는 것도, 먹는 것도.
집밥은 단순, 간단하게.
좋은 냄비, 제철 야채, 생선, 질 좋은 고기 조금,
맛있는 소금.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고 나니,
욕심내던 그릇들은 하나둘 줄었고,
냉장고를 가득 메우던 소스들도 사라져 갔다.
이제는 냉장고가 비어야 장을 보러 나선다.
좋은 기름, 향이 살아있는 야채, 그리고 다양한 소금.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소금을 꼭 사 온다.
마트에서 처음 보는 소금이 있으면 시도해 본다.
고기용, 야채용, 볶음용-추천대로 쓰며 나만의 맛을 선별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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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로 가는 여행을 좋아한다.
기차 칸 창문은 나를 일상에서 잠시 떼어내어,
다른 속도로 세상을 보게 한다.
아마도 내가 찾고 싶은 삶이란,
좋아하는 것을
더 깊이 즐길 수 있는 여행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때로는 애써 겨우 창문을 만들어 놓고도
열기가 두렵기도 하고,
저 멀리 내다보기가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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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을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 가을 공기를 들이고,
커튼을 활짝 젖혀 햇살로 실내를 채우며,
창밖에 겹겹이 쌓이는 빛과 그림자를 따라
깊어지는 계절을 그저 감사히 마셔야겠다.
썸네일 이미지 출처: Salvador Dalí, Girl at the Window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