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선하게 살겠다 다짐하더라도 나는 언제건 어디서건 '개새끼'일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에게 배려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오해라는 것으로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나의 의도와 무관한 상대가 인식하는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상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그대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보다는 매너로 상대를 대하기 때문에 나의 의사와 표현방식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고, 서로의 진심이 만나지 못함으로 해서 우리는 서로 걷돌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수많은 오해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지 않는 나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의 배려에는 깊이가 얕고 또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조건적, 환경적 한계가 있다.
젊은 청춘의 시절에는 오해가 생겼다고 느꼈을때는 풀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어느 시절부터는 그렇게 노력하기를 멈추었다. 오해라는 것은 변명으로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을 겪어보며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상대와 잘 맞지 않는 경우는 계속 그렇게 풀리지 않는 체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일적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오해의 연속이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진심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익이 만나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계는 형성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보통 상대는 적대적 이미지나 대립적 관계로 가게 된다. 사실 그런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삶이 고단하다고 느끼게 된다.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를 훨씬 더 별로다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 지점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의 내면과 만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배려하는 데 집중한다.
사랑은 무한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책에서 본 인간관계에 진실에서는, 인간은 동시에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12명 정도라고 한다. 우리의 감정은 그만큼 한계가 있다. 사랑의 힘은 굉장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당장 내가 회사에서 대화하는 동료들의 명수를 헤아리더라도 12명에서 7명 정도이다. 그러니 그 외 사람들과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수 없기에, 나의 외양만 보고 목소리와 말투만으로 판단할 것이며 그로 인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나는 별로일 거야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상대에 대하여 미워하진 않지만 별로라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이다. 상대의 관점에 집중하는 것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나의 관심사는 꾸준히 소명과 임무들에 대하여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너그럽게 내려놓으며, 열심히 오늘을 살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목표를 목에 걸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임을 깨닫고 걸어갈 뿐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하여 나는 철저히 손절하려 애를 쓴다.
퇴근 후 책을 읽으면 두통이 와서 며칠간 진지하게 작가라는 꿈을 꾸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 업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근무시간에 책을 읽었다. 신기하게 두통이 오지 않아서 이렇게 회사에서 라도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작가준비를 해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해야할 것은 나의 비전에 대한 고민과 대안이다.
대통령도 뒤에서는 비평을 하는데 하물며 동료와 상사의 경우는 오죽하겠는가...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가능하다면 오해하지 않으려 애써야 하고, 비판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대가 나에게 갖는 오해와 별로야라는 의견에 대하여 그럴 수 있고, 어쩌면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든 삶에는 상관이 없다. 동료나 직장상사가 인사고과에 영향을 끼치는 조직이라면 어쩔 수 없이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내가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 이상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이다.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 선을 넘으면,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관계는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하여 바보처럼 잊어버리고 상대를 대하면 오히려 관계는 더 좋아질 수 있다. 사랑할 수 없을 지라도 아무감정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 관계의 전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상대의 의도, 저의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오히려 관계를 나쁘게 만드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한다.
신앙에 관해서도 그렇다. 보통의 타인보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기독교인을 바라보고 평가한다. 어쩌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정신적,물질적,영혼적으로 어떤 결핍들로 신을 찾게 된 경우도 많았으므로,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보통사람들처럼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다만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살 뿐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내가 별로일 수 있다. 가정이 없이 혼자 살아가는 내 성향이 별로 일 수 있다.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내가 시끄러울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와 상극인 경우에는 그럴 때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가 어떻게 나를 보든 게의치 않는다. 나는 내 길을 갈 뿐이고, 상대는 상대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고, 우리는 지구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별로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