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 데 아무래도 장난이 아닌 것 같다. 다만 나의 욕심은 정서적 욕심이나 자아실현의 욕심 쪽일 뿐이다. 혼자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기분이 언짢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으면 내내 찜찜함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집을 실행하고 만다.
아예 욕심이 없어진 부분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기본적으로 메이크업이라는 것을 하지만 외모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게임에도 도통 관심이 없다. 대결구조의 긴장성을 느끼기 싫어하고, 승부욕이 생기면 기분이 나빠지는 케이스라고 할까. 그런 쪽이다.
체력도 이를테면 백 미터 달리기를 하는 편이고 마라톤은 오래 달리기도 해 본 적이 없다. 운동도 극히 싫어한다. 사실 하고 싶은 것은 더 많았다. 실패라는 말을 없애고 싶어 결혼도 다시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은 서로간의 개인적 희생과 같이 하는 공동의 삶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
사실 결혼보다는 연애가 더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워낙 낭만적인 성향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는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도 만들고 가장 불행하게도 만드는 마력적인 힘이 있었고 그것은 삶을 휘둘리게 하기에 좋은 사건이었다. 아마 그래서 혼자 살아가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가정생활은 하고 싶은 것을 하기에 체력과 게으름이 받쳐주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평범한 가정의 행복은 이룰 수 없는 꿈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것은 40대 중반이 넘어서 알게 되었는데, 막상 내가 연애를 하더라도 뭔가 느껴지는 허전함은 알 수 없없고, 결혼을 하였을 때 답답함을 느꼈던 원인을 그때서야 알았다. 나는 사람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색을 하며 살고 싶어 하는 삶과 공동체의 삶은 나로서는 대치되었다.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지루해하고 심심해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누구나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평범한 삶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신은 나에게 정말 불행할 것 같은 길을 소개해주었다. 사실 너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이다.
분명히 가정이 있었더라면 글을 쓰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가사노동과 글쓰기와 자녀 양육을 하며 살 정도로 부지런한 성향이 아니다. 아마 계속되는 인생의 허무함과 답답한 타인의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외로움이 같이 살면서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는 삶보다 훨씬 나에게 맞다고 확인했던 것은 비로소 내가 혼자 살기로 결정을 하고, 혼자있는 시간에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부터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글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인간에게 굉장히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었다. 글을 통해서 감정이 이성적으로 조정되고, 내 삶이 객관화되고 분석되고 대안이 마련되어 갔다. 또한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글을 통하여 글이 친구인 것처럼, 글을 쓰는 순간, 바로 그 글이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글을 쓰는 순간에만 나타났다.
세상에는 다 가질 수 없는 꿈들이 많다. 인생에 내가 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무척이나 울적했었다. 그렇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포기해야 할 것이 있고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포기해서는 안될 것은 자신일 수 있는 정체성 같은 것이다. 그것이 나를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감정을 심어준다. 그것이 나에게는 글이었다. 그리고 포기해야 할 것은 가정이라는 단위였다.
읽고 싶은 책도 세상에 너무 많고, 보고 싶은 미술 작품이나 음악도 너무나 많다. 그야말로 24시간이 모자라다. 나는 이 예술의 삶을 택하고 현실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상주의자 같은 나의 성향을 부정할 수가 없다.
가끔 두통이 심하게 오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보면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면서 티브이를 보거나, 생각을 하면서 음악을 듣거나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혼자 지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감성을 느끼고 싶은 정서적 욕망의 형태이지 않을까 싶다.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니다. 그저 타고난 성향일 뿐이다. 여기에 뭔가 내가 노력을 해서 가진 욕망은 없다. 그저 내 욕망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방향이 아닌 곳으로 나아가며,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간절하고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정 짓고, 그것을 기준으로 대치되는 것들을 타협하거나 포기하면서, 배열을 맞추기 위하여 고민하고 나의 현실적 상황과 조건을 맞추어 가며 살아왔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정말 직장은 어쩔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내가 원하는 것의 영역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영역이다. 삶에는 해야만 하는 영역, 정체성이 원하는 영역, 포기해야 하는 영역이 있다. 먼저 특성을 이성적으로 객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내 욕망을 조절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치되는 두 가지 욕망을 같이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되어가다가 고통스럽게 살아가게 된다. 그 기준으로 하나하나 맞춰가다 보면 삶이 질서가 생기고 정돈이 되어 루틴이 된다.
누구에게나 이룰 수 없는 꿈이 있다. 누구에게나 이룰 수 없는 꿈을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정체성일 수 있는 자신의 꿈이 실현에 가까워 지기 때문이다. 욕망들을 조절할 때에 가끔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며 눈앞이 흐릿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였다. 수많은 욕망중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 꿈이라는 욕망이 과연 자신의 정체성인가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인간에게는 어느 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비로소 그때에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비로소 그때에 불행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절대적 기준을 선정하고 그것을 위해 해야 하는 영역과 포기해야 하는 영역을 잘 정리하며 가다 보면 삶은 훨씬 나와 더 닮아져 갔다. 이룰 수 없는 꿈은 당시엔 슬픔이었지만 지금은 잘 보내주었다는 생각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