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목소리

by miel






하루를 마감하며 다른 세상으로 가기 전에 내 손을 잡아끄는 상념이 있다. 오늘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나의 게으름인가...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인가... 신의 목소리인가... 게으르진 않았다. 패스. 실력이 부족한 것은 맞다. 실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을 했는가. 그렇다.


그리고 나에게 운이 오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실력이 아직 부족한 상태이며, 신이 주시는 운이 오지 않았다이다. 여기에 나의 부족함이 있었는가. 크게 문제 되었던 상황이 없었다. 그렇다면 패스이다.

내 손을 잡아끄는 상념을 뿌리치고 나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가끔 나에겐 신의 목소리라고 하는 뜻을 자주 헤아린다.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지만 가야만 한다면 나의 성향은 힘들어도 가는 성향이다. 나의 성향을 이렇게 만들어주신 이유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막상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었지만 또 막상 걸어가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길이었다. 가지 못할 길을 주지는 않으신다. 그때는 신의 목소리를 정확히 듣는다.

( 믿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꿈을 통해서 예지를 하게 될 때도 가끔 있다 )


고등학교 때 운동권 한 학년 선배였던 분이 중국에서 심장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비보를 접하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지구 어느 곳에서 아직도 지금도 살아있을 것만 같은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로서는 죽음이 두려운 것보다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이질감이 어색하다. 그 선배의 성향이 특이하여 친하진 않았지만 비보를 접했던 순간 너무도 생생한 선배의 모습이 떠올라 당혹스러웠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도 허무한 것이다는 생각이 다시 떠오르면서, 살아있는 것 자체의 허무함에 몸둘바를 모르겠다. 이 세상의 행복조차도 기쁨조차도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기쁨과 고통이 아무것도 소용없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다시 내가 왜 태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시간을 소환한다.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그나마 이 허무한 세상을 버티고 살지만, 사후세계를 믿지 않을 때의 세상이란 너무나 쓸데없는 것이다.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이 이 세상의 수많은 질문들이 성서 속에 이어지며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해낼 수도 없는 경지의 정신과 영적인 영역을 들여다보며 연신 감탄하며 감동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그런 확인의 시간들이 있었다. 나는 의심이 굉장히 많은 비평적인 편이다. 특히 글이나 이론에 대해서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일어날 수 없었던 나의 시절을 일으켜 세운 영적인 힘과 모든 상황들의 이루어져 가는 힘들에 대하여, 완전히 확인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의 믿음은 오래 걸렸다. 아마 누구라도 나의 상황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의 목소리를 그런 식으로 온다. 인정할 수밖에 없게 무자비하게 들이닥친다. 단지 아직 신의 목소리가 도달하지 않았을 뿐이다.






간음한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끌고 온다. 예수께 저 여인을 어찌하면 좋겠냐고 시험한다. 율법은 돌로 쳐서 죽이는 형벌이 있었고,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서로 부딪힌다고 보았기 때문에 어느쪽이든 다른 반대쪽에 대한 입장으로 예수를 저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가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저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자 모두 조용히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그리고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고 하신다. 율법은 죄의 엄중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한계를 구원하는 대안인 사랑인 것이다. 인간안에는 비난은 있지만 사랑이 없다.






허무주의자였던 내가 죽음을 더 이상 꿈꾸지 않았던 것은 성서 때문이었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책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포기하고, 세상과 철저히 연합하여 살아갈 때 만난 신학은 과학을 넘어 철학을 넘어 존재하고 있었다. 과학은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철학은 인간의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한다.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는 성서의 영역이다.


성서를 30독을 하였지만 성서의 한 줄이 어떤 의미와 깊이가 있는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 그리고 완전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머리가 깨질것 처럼 너무 아득하고 멀다. 미로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느낌이 들며 자주 잊어버리곤 하였다. 단언컨대 성서는 내가 읽는 책중에 가장 지루하지 않고 가장 신비스럽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영혼의 서적이었다.






어쩌면 내가 성서를 통하여 세상의 행복을 알게 되었다기보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세상의 위험성과 절망을 재확인한 셈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구조적 악함의 대안을 부활로 계획한 신의 목소리에 그 밖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에 동의하였다. 절대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악함으로 만들어진 세상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것을 하고 살지만 그것의 근본적 문제 해결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신의 몫이다.


내안에도 이익으로 포장되지 않은 절대선이란 것은 없다. 허무와 절망감은 세상의 살아있는 존재로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임을 안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신을 닮아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존재한다. 아마도 그 영원성에 대한 정신과 영혼의 영역의 성질과 한시적 육체에 부딪힘 속에 일어나는 파열음이 인생의 고통이리라.


이 모든 것을 감안하면 인간이라는 틀 안에서는 충분히 행복하고 안정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라는 인간으로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아냈으며 신의 목소리가 내게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으며 하루를 결산하고 있다. 너무 높이 올라가면 언젠가 떨어질 때 너무 고통스럽단다 라고 말이다.

그러하므로 나는 충분히 허무하고 충분히 행복하다. 아주 다행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