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둘 데가 없어 한동안 힘들었다. 집과 돈 문제, 인간 관계의 어려움 등등, 근심의 아궁이 속에 웅크리고 있던 불씨들이 타닥타탁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 아니어서 조정이 쉽지 않고 해결의 방법을 찾기는 더더욱 어려워 보였다.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내일을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이 소용없으며 전개되는 상황에 맞춰 그저 흘러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런 깨달음은 평화시에만 의젓하고 막상 버거운 문제가 불거지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출렁대는 마음을 붙잡아 진정시키려니 진이 빠졌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려면 적어도 1억, 많게는 2억이 더 있어야 한다. 아직은 동네 친구를 만나는 것이 재미있는 작은조카 녀석과 성당에 매일 나가는 엄마 때문에 좀더 이곳에 머물고 싶은데, 어떤 결정을 내리려는지 집주인은 2 주일째 나를 기다리게 하고 있다. 옮겨 앉을 곳을 인터넷으로 찾다보면 형편에 맞는 동네는 멀고 낯선 곳뿐이라 입안이 깔깔해졌다. 내 집 없이 사는 것이 피곤했다. 게딱지 같아도 우리 집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지난 주에는 우연히 제 아버지 집에 들른 작은조카가 아빠가 재혼을 할 것 같다고 내게 말했다. 녀석은 자신의 남은 인생을 다 걸고라도 결단코 막을 거라며, 제 누나가 들으면 걱정할까봐 농담 반 진담 반의 아픈 말들을 내게만 몰래 꺼내놓았다. 그 밤에는 나도 녀석도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모두에게 우리의 합리적 의심을 공개했다. 큰조카는 의외로 쿨하게 저는 가볍게 생각할 거라해서 조금 놀랐다. 우울과 공황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죽은 제 엄마로부터 잘 분리가 됐다는 걸 알았다. 큰조카의 반응을 보면서 나는 나와 작은녀석의 문제를 깨달았다. 세상을 등진 동생을 내려놓으면 내 마음 속에 지뢰처럼 묻혀있는 제부에 대한 증오와 멸시를 흘려 보낼 수 있을 텐데, 아직 남아있는 미련이 억지스럽고 한갓된 감정 안에 자꾸만 나를 가둔다.
사방으로 흩어진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괴로운 가운데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하나를 읽었다. 감사하게도 뒤숭숭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너무 고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인생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산에 다람쥐 한 마리가 태어났다 죽는 것만큼, 길가에 풀 한포기가 났다가 시드는 것만큼, 인생은 별 게 아니에요. 저의 명심문은 '지금 출발합니다'입니다. 이 말은 어제까지는 연습이고 오늘 하루가 실전이란 뜻입니다. 원래 연습을 할 때는 이런 저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지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중에서-
죽고 사는 것이 별일 아닌데 멀리 이사 가는 것이 뭐 대수겠나. 형편껏 살면 되는 것을 욕심을 버리지 못해 내가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있었구나. 그래, 다 괜찮다. 지금껏도 살았는데 앞으로 못 살겠나. 어제까지의 일들은 모두 내려놓고 가볍게 오늘을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