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죽 1

by 강미


오늘도 종일 폭우와 불볕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장대비가 내리꽂히는가 싶다가도 뜨거운 볕이 공기를 삽시간에 데우고, 빨래가 바짝 마르고 있는데 갑자기 바가지 물이 쏟아졌다.

수완은 바람 부는 초저녁을 잡아채 옥상에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펼쳤다. 어릴 때 좋아했던 옥상은 집 떠난 뒤에도 가장 그리웠던 곳이다. 수완은 옥상을 휘휘 둘러본 다음 고모에게 맥주 캔을 건네며 말했다.

“여긴 옛날보다 더 깨끗해진 듯. 저기 나무상자 밭은 고모가 가꾸는 거야? 옥수수?”

미영이 캔을 따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완은 의자 밖으로 삐져나오는 고모의 엉덩이와 처진 팔뚝 살을 보았다. 고모는 이십여 년 전 갑자기 불어난 몸무게가 지금까지 그대로였다.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수완은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 내가 고모 같아. 옛날이야기 듣던 수완 어린이는 어디 갔지?”

“그러게. 세월 빠르다. 너는 청춘이고 나는 늙고.”

“내가 청춘? 마흔이 다 되어가는데 무슨.”

무심코 내뱉다 수완은 입을 닫았다. 고모가 늙지 않았다는 말부터 했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실수를 만회라도 하듯 수완은 화제를 바꾸었다.

“여기서 고모가 옛날이야기 많이 해줬잖아. 아, 그때 좋았는데.”
이야기꾼 고모의 직업은 유치원 교사였다. 고졸 임시직으로 출발해 어찌어찌 정교사가 된 고모는 최근 공립병설유치원에서 명퇴했다. 정년 이전에 한 퇴직이라 몇 년 치 명예퇴직금도 받았다고 했다. 유치원이 삶의 전부라던 고모의 선택이 믿기지는 않았으나 방문 명목은 돼주었다.
법적으로 싱글인 고모, 아마도 생리학적으로도 처녀일 고모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기억나?”

“기억날 뿐 아니라 지대한 영향도 받았지. 암시였을까 예언이었을까 싶다니까.”

고모가 맥주를 들이켜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모 얼굴에서 유일하게 예뻤던 눈은 예전 그대로였다.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얘기 있잖아. 할머니가 눈물 뚝뚝 흘리고 있을 때 송곳, 개똥, 밤톨, 맷돌 들이 도와주잖아. 보잘것없는 것들이 모여 결국 호랑이를 물리치고. 약자들이 힘 합치면 강자의 폭력도 이길 수 있다는 걸 그때부터 믿었나 봐. ……뭐, 지금은 그렇다고 볼 수도 없지만.”

“활동가께서 왜 이리 약한 말을……”

“그러게, 나도 지치나 봐. 암튼 나 이렇게 사는 거 고모 지분이 크다는 거 알아주셔.”

“기억이 다른가? 넌 부지런한 하녀 젤 좋아했어.”

“그래? 난 모르겠는데. 내용이 뭐였지?”
“옛이야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수완아, 사무실은 며칠씩 자리 비워도 되는 거니? 후원 필요해?”

“아니, 괜찮아. 매번 도와줬잖아. ……고모랑 있으니 참 좋다. 나도 다 때려치우고 고모랑 여기서 살까 보다. 해질녘마다 여기서 맥주 마시고. 외로운 사람끼리……”

“얘가 왜 이러시나. 너 무슨 일 있지? 애인이랑 헤어졌어? 며칠 동안 쓸고 닦고 요리까지 해대니 불안, 불안하다.”
“쳇, 우렁각시 다녀간 마냥 좋다더니. 근데 고모는 왜 유치원 그만뒀어?”

수완이 있는 동안 고모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두어 블록 떨어진 공공도서관을 잠시 다녀올 뿐 생필품과 음식 재료는 온라인으로 해결했다. 퇴직자가 과로사하는 시대라는데 고모는 불러주는 사람도 없나 보았다. 사교성이 없다는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비대한 몸에 늙기까지 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지금이 말할 타이밍일까? 며칠 동안 시시때때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수완은 고모를 곁눈질하며 성공 가능성을 저울질해 보았다. 수완이 중학교 2학년 때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운전자가 엄마의 내연남이라고 단정한 아빠는 분노하기 바빠 누구의 과실인지, 법적 처리가 어떻게 되는지 관심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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