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죽 2

by 강미

수완이 대학생이 되던 해 아빠는 고모가 보는 앞에서 수완에게 통장을 주었다. 재혼으로 새 가정에 아이까지 둔 남자가 지을 법한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빠가 말했다. 잘 살아라.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수완은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엄마의 생명보험금 2억으로 전세방을 구하고 정기예금을 들었다. 그 돈 헐어 쓰고 싶지 않았던 수완은 매달리듯 공부해 장학금을 받고 겹치기 알바까지 했다. 이런저런 NGO 단체 활동도 꾸준히 참여했는데 졸업 후 직업 아닌 직업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활동가로 지내면서 통장이 점점 가벼워졌다. 전세 자금은 1억 그대로인데 고를 수 있는 방은 전철역에서 점점 멀어지고 한없이 좁아졌다. 그마저 급기야 전세 사기. 꿈을 포기할 것인가 삶을 포기할 것인가가 남의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수완이 활동가 아닌 주민으로 쪽방촌에 살아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엄마는 생명보험과 함께 지혜도 남겨주었다. 네 고모는 평생 혼자 외롭게 살 거야, 고모한테 잘해라, 무조건 잘해라…… 고모 뒷담을 대놓고 하던 엄마의 말이라 이상했지만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고모가 해준 옛이야기처럼 엄마의 그 말도 수완에게 내내 잊히지 않았고 수완을 움직이게 했다. 옛이야기와 달리 엄마의 말은 재해석이 아니라 정확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완에게는 못죽이 있었다. 수완은 나그네가 아닌 자신의 못죽을 끓여 고모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흠, 흠. 수완은 목청을 가다듬고 늑장 부리던 말을 드디어 내뱉었는데 안타깝게도 원래 하려던 말은 아니었다.

“엄마 말이야, 그 시대에 어떻게 보험을 다 들어놓으셨대?”

“몰랐어? 네 아빠가 잠시 영업했잖아. 초짜들 순서가 그래. 본인, 가족, 친척.”
“고모도?

“당연하지. 종신에 생명에 연금저축에……”
“아직도 가지고 있어? 내 건 다 해약했다며.”

“나는 유지했지. 덕분에 지금 혜택 보는 것도 있고. 네 종신, 교육 보험은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그때 내가 알았으면 살렸을 텐데……”

그때 빗방울이 하나둘 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고 빠르게 바닥을 적셨다. 수완과 미영은 서둘러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철문 안으로 옮겼다. 거기 계단참은 비는 피하되 열어둔 철문 너머로 비 구경은 가능한 곳이었다. 혼자 노는 자리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완은 고모가 위치를 정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아, 수완은 무심결에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비 내리는 풍경이 철문 프레임 안으로 예쁘게 들앉아 있었다. 청동색 액자로 장식한, 움직이는 그림이었다. 수완은 바닥으로 곧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와아, 크라운이다. 고모, 저기 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왕관 모양을 만들어. 멋지다.”
“기억하는 거야? 대여섯 살 때 했던 말을 지금도?”
“헉, 꼬마 때? 그럼, 난 뭐야. 그때 이후로 하나도 안 큰 거야?”

“무슨? 잘 자란 어른이라 소싯적 감성까지 간직하고 있는 거지.”
비 때문일까, 고모 말 때문일까, 갑자기 우울해진 수완이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고모, 나 열심히 살았어, 진짜. 명품 가방 든 적 없고 변변한 화장품 하나 없이 지내도 늘 뿌듯했어. 남 위해 사는 게 좋더라고.”

“그럼 잘 알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냐.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 조카지만 존경해.”

“그런데 고모, 이제는 ……못하겠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 안 변하더라. 노상 취한 채 공짜만 바라는 쪽방촌 인간들, 꼴도 보기 싫어. 제일 기막혔던 게 뭔지 알아? 내가 전세 들어 있는 빌라가 통째로 사기당했는데 바지 임대자가 내 구역 사람인 거야. 주민등록증을 뺏겼거나 팔아넘겼겠지.”

수완의 말에도 고모는 미동 없이 내리꽂히는 비만 바라보았다. 수완은 빗소리에 말이 묻혔는가 싶었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거지 됐어. 이제 쪽방촌에 살게 될 거야. 정말, 정말이지 열심히 싸웠는데 이런 끝은 너무하지 않나. 내가 뭘 잘못……”

그때 훅, 감정이 받쳤다. 온몸의 습기가 모두 출동한 듯 눈물이 줄줄 흘렀다. 수완은 이 순간을 위해 십수 년을 참았다는 듯 소리를 높여가며 울었다. 한참 뒤 미영이 몸을 틀어 수완의 손을 잡았고 수완은 고모 품에 안겼다. 물컹하고 뜨뜻한 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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