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죽 3

by 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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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이 오빠의 전화를 받은 건 일 년 전쯤이었다. 코로나 시국은 물론 그 후에도 제사비 잘 받았다거나 명절 선물 고맙다는 문자메시지 정도로만 소통하던 사이였기에 만나자 하니 가슴부터 벌렁거렸다. 오빠와는 새언니가 죽고 난 뒤 급격히 소원해졌다. 핏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새언니는 십 대 시절부터 미영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운전자와 어떤 관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미영은 오빠의 분노를 감당하고 수완의 끼니를 챙기느라고 친구의 죽음을 애도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죽은 친구와 더 살가워지고 살아 있는 오빠와는 멀어졌다. 오빠가 재혼하고 새 조카가 생겼지만, 미영은 오빠 가족과 가까워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만날 때도 있었지만 새언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남자아이는 유치원에서 만나는 원생 이상의 끌림을 느낄 수 없었다. 미영에게 조카라는 작대기는 늘 수완으로만 연결되었다.

오빠를 기다리는 동안 미영은 주방과 화장실을 청소했다. 지은 지 30년도 더 된 다세대주택이었지만 청소 직후는 좀 나았다. 집이나 사람이나 자주 닦고 가꿔야 한다는 새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친구는 20년 전에 죽었지만, 그의 흔적이나 말은 집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오빠가 약속보다 늦어지자 미영은 식탁에 앉아 북유럽 민담집을 폈다. 얼마 전 새로운 번역본이 나와서 설레는 마음으로 샀다. 그림 형제 책을 비롯한 동화나 민담 책은 이미 열 종 이상 접했지만, 다시 읽기의 즐거움이 컸다. 이야기는 매번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었고 각자 해석되었다. 미영이 볼 때 무한 광대하다는 사람의 마음은 물론 과학기술이나 우주개발이니 하는 것들도 옛이야기에 다 있었다. 옛이야기 창으로 보면 해석되지 않을 게 없었다. 미영은 유치원에서도 이야기할매로 통했는데 마녀할매라고 부르며 처진 팔뚝 살이나 부푼 뱃살을 찌르고 달아나는 아이도 있었다. 어쨌든 원생들은 늘 미영을 둘러쌌고 어린 학부모들도 마음을 열었다. 인성교육에 좋잖아요. 옛이야기를 오해하는 지껄임이지만 그 덕분에 미영은 학부모의 신뢰를 얻고 젊고 예쁜 교사들과 공존할 수 있었다.

“야, 여긴 하나도 안 변했네. 뭐해? 고모님께 인사드려.”

오빠가 선 채로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미영도 같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미영이 늙고 비대해지는 동안 오빠는 마법에 걸려있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 오빠의 재촉에 뽀얗고 훤칠한 남학생이 고개를 숙였다. 민정휘입니다. 희가 아니고 빛날 휘. 백 년 마법에서 이제 막 깨어난 왕자처럼 말이 또록또록했고 몸짓도 품위 있었다.
“금방 컸지? 곧 고등학교 간다. 담임은 과학고 추천하는데 얘는 일반고로 간다네. 의대 가려면 내신을 잘 받아야 하니까. 얘는 누구 닮았는지 여태 전교 1등 놓친 적 없다. ……근데 야, 너는, 그동안 인생 편했구나. 나가면 네가 누난 줄 알겠다.”

식탁에 앉으며 오빠가 돌려 말했다. 미영은 피식 웃었고 정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미영은 정휘가 그 이름대로 빛나는 아이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정휘는 몸도 재발랐다. 미영이 복숭아를 꺼내 씻자 칼을 찾아 건넸고 찻잔에서 티백을 꺼내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 어른들 이야기를 다소곳이 들었고 묻는 말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대답했다. 미영은 자주 정휘를 보았고 그때마다 오빠는 미영을 쳐다보았다.

“우리 아들, 친구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다섯 시 되어 가네. 아, 얘 친구가 이 동네에 산다네. 걔는 과학고 지망. 암튼 잠깐 만나기로 했대. 아들, 나중에 전화해. 미영 아니 고모랑 나갈게. 미영아, 저녁 약속 없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고기 먹자.”

오빠가 양쪽을 번갈아 보며 떠들썩하게 말했다. 미영과 정휘는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을 알아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 순간 미영은 정휘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정휘가 살풋 웃고 미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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