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죽 5

by 강미

대못 하나로 못죽을 끓이는 나그네에 관한 판단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긍정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자라 하고 어떤 이는 처세술이 뛰어난 사기꾼 기질을 말하기도 한다. 가진 것 술술 내주는 할머니를 두고도 한심하고 불쌍하게 보는가 하면 함께 나누고 누리는 기쁨을 발견하였으니 다행이라는 평가도 있다. 미영은 선 채로 물을 마신 다음 식탁에 앉았다. 적막이 내려앉은 공간엔 에어컨 실외기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그제야 생각난 듯 미영은 거실 한쪽에 서 있는 에어컨을 껐다. 무덥고 습한 여름에도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했던 에어컨이 오늘은 웬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식탁에 다시 앉자 바짝 일어섰던 신경들이 주저앉고 예민했던 감정이 부드러워졌다. 마음이 다시 너그러워지자 그 공터에 오빠와 정휘가 들어섰다. 스마트폰을 열어 무심코 은행과 보험회사 앱을 열다가 미영은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참을 만큼 참았으니 후회 없다는 마음 뒤에 어른들이 싸우는 장면을 정휘가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뒤따랐다. 지긋지긋한 악연, 잘 끊었다면서도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물어나 볼 걸 싶었고 다시 안 본다면서도 통화 목록을 열어 오빠 번호를 찾고 있었다. 미친년, 미친년, 미영은 허공에 대고 구시렁거렸다.

미영의 중얼거림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었다.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 미영의 신경이 바짝 섰다. 오빠였다. 문이 열려 있었는지 비번을 눌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미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식탁 위에 놓인 과도를 손에 쥐었다. 눈앞이 하얘졌지만, 미영은 침을 삼키며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미, 미영아, 잠깐,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주라.”

오빠가 반쯤 구부린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낯설디낯선 모습은 그뿐이 아니었다.

“미영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못나서 그래. 늦었지만 사과할게. 진심이다. 용서해 주라. 내가 힘들어서……”
초라하고 기죽은 얼굴, 떨리는 손과 흔들리는 눈빛에 미영이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오빠가 식탁 건너편에 앉았다. 거짓말 말라고, 속이지 말라고 해야 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어서 나가라 해야 했다. 그래도 꿈쩍하지 않으면 과도를 내밀며 현관 밖으로 내쫓고 문을 잠가야 했다. 하지만 미영은 의자에 앉고 말았다. 지겹고 바보 같은,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할 측은지심이었다.

긴 정적 끝에 오빠의 동굴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서웠다. 나도 무서워서, 누구에게라도 뒤집어씌워야,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못났지만 내가 그랬더라. 아버지 그렇게 됐을 때, 집 날릴 때, 수완 엄마 사고 때…… 크, 크큭.”

오빠가 울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졌고 미영은 헐렁한 외투 같은 거죽 안에 먼 옛날의 소년을 보았다.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던 아이, 멍청하다고 욕먹고 걷어차이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아이, 사내새끼가 어디서 우냐는 호통에 끅끅 눈물을 삼키던 아이가 되살아났다. 아아, 그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밭에 나갔다고 말해 에미나 자식이나 한통속이라며 다시 맞았던 남자애, 아버지가 찾는 소리에 너는 숨어 있으라며 동생 대신 나섰던 남자애……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미영의 눈앞이 새까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몸이 확 달아오르고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무시로, 느닷없이 찾아들던 갱년기 증상과는 달랐다.
오빠의 울음과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미영은 물을 끓여 국화차를 준비했다. 함께 울 수 없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

“정휘가 참 신기해. 아기 때부터 우유 먹여 눕혀 놓으면 칭얼대지도 않았어. 저 혼자 한글, 사칙연산 다 떼더라니까. 길거리 간판, 음식점 메뉴판 보면서 물어봐 쌓더니 갑자기 통달하더라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오빠가 화제를 바꿨다. 어깨와 가슴이 펴지고 자부심 가득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졌다. 유치원에서 날마다 만났던, 젊은 부모들이 보이는 미소와 같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해. 학원은커녕 책상머리에 오래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맨날 1등이야. ……너 닮았나 봐. 어릴 때 아주 똘망똘망했잖아. 너도 뒷바라지만 제대로 받았어도 유치원 선생이 뭐냐, 저, 서울대 강단에 서 있겠지.”

“말도 안 되는, 별 소릴 다 한다.”
“타고난 핏줄이라는 게 있으니 별 소리는 아니다. 근데 요새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 없다더라. 타고난 머리만으로는 안 된대. 정휘도 맺힌 게 있는지 저렇게 의대, 의대, 노래 부르는데 아무리 똑똑한 놈도 그 뭐냐, 선행학습이라는 거 해야 한다니 과외수업 받아야 한대. 근데 특별한 아이들 모아놓고 하는 수업은 엄청 비싸고. 그런 과외는 돈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 암튼 교육계도 희한해.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의대를 갔다 쳐. 그 뒤가 더 첩첩산중, 아무리 짧아도 10년 공부인데, 저도 고생이겠지만 그 뒷바라지는 또 어떻게 한다니. 어휴, 우리 형편에 가당치도 않다. 그러니 가도 걱정, 안 가도 걱정, 아, 잠깐, 정휘도 양반 되긴 틀렸다. 제 얘기하는 줄 알고 전화했네.”

정휘의 목소리가 미영에게도 들렸다. 세상 다정한 부자간 대화였다. 미영은 살짝 몸을 떨었다. 앞에 보이는 동네책방이 근사해 보이니 거기서 기다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미영의 단골 책방을 정휘가 알아봐 주었다는 게 신통방통했다. 고모님과 함께 나오시라는 말도 가슴에 꽂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통화가 아쉬웠는지 오빠는 스마트폰을 든 채로 정휘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영은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미간을 찌푸리면서 빠져들었다. 오빠의 말에 의하면 정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말아먹은 가문의 영광을 다시 찾을 재목이었다. 그러니 잘 키워야 한다고,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모든 걸 걸고 뒷바라지해야 한다고도 했다.

30분 뒤, 미영은 오빠를 혼자 보냈다. 정휘가 섭섭해할 거라며 강권하는 바람에 미영은 두통 핑계를 댔다. 실제로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두통약을 찾다가 미영은 식탁에 다시 앉았다. 바늘이 뒷머리를 콕콕콕 찌르는 듯 아팠다. 갱년기 증상인지 열이 확 올랐다. 속으로부터 욕지기가 치밀어오르고 눈물도 났다. 오빠는 정휘에게 투자하는 셈 치라고 했다. 든든한 보험 넣는다 생각하라며 원한다면 계약서를 쓰겠다고 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도 덧붙였다. 죽고 나면 어차피 조카에게 넘어갈 재산인데 지금 인심 쓰면 좀 좋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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