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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계속 세차게 내렸다. 저러다가 갑자기 그칠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여러 날 겪었는데도 그랬다. 수완은 울었던 게 민망하기도 해서 고모에게 내려가자고 했다. 고모가 간이테이블을 치우는 동안 수완이 캠핑 의자를 접었다. 어릴 때부터 공유한 시간이 많아서인지 죽이 잘 맞았다. 앉은자리 정리를 금방 끝내고 수완은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왔다.
“2차는 여기서?”
고모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완은 들고 있던 술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거실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큰 테이블은 튼튼한 원목 다리에 자연무늬 세라믹 상판을 갖추고 있었다. 원색 의자와 세트를 이뤄 척 보기에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와아, 엄청 편하다. 이거 비싼 거지?”
수완이 테이블 상판을 손바닥으로 쓱 훑으며 말했다. 몸을 비틀어 진청색 등받이도 쓰다듬어 보았다.
“내 명퇴 선물로 샀어. 평생 나한테 인색했더라고. 나이 들고 살까지 찌니 바닥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겠어.”
“오우, 멋지다. 그래도 혼자 살면서 8인용은 너무한 거 아냐? 설마 여기서 잠도 자나.”
“앞으로 쓰임이 있겠지. 나도 제대로 살아보려고. 흐흐, 술이나 마시자.”
고모는 웃으며 맥주 캔을 들어 보였지만 수완은 궁금증과 불안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제대로 살지 않은 건 뭐며 쓰임은 또 뭔 말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던 고모는 수완의 거듭되는 재촉에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흐흐, 이런 계획은 네게도 지분이 있을 거야. 너 사는 게 항상 자랑스러웠거든. ……앞으로 동네 애들 틈틈이 봐주려고. 우리 동네가 집값이 싸니 젊은 사람도 꽤 들어와 살아. 아기가 열이라도 나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못 보내거든. 그때 도와주면 좋잖아. 노인들도 쉬어가시라 하고 동네 분들 모여 독서 모임도 하고……”
“그래서, 에어컨도 바꾼 거야? 전기밥솥도 큰 걸로?”
수완의 목소리가 급하고 떨렸다. 고모의 말은 예상 밖을 뛰어넘어 수완의 계획을 불안하게 했다.
“그렇지, 뭐. 2, 30년씩 썼으니 바꿀 때도 됐고.”
“왜?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아니 내 말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고모 스타일도 아니고, 다 늦게 웬 고생인가 싶기도 하고…… 아, 몰라.”
“얘가 왜 버벅거려? 너 본받으려는데, 너처럼 헌신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사는 것처럼 살아보려고.”
“내가 해 보니 너무 힘들어서 그래. 고모, 그냥 고모 식대로, 편하게, 아, 고모. 내가, 내가……”
수완은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안하고 참혹해서 화장실이라도 다녀와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옷을 입은 채로 변기에 앉아 있는데 고모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얼른 나오라고도 했다. 수완은 거울 앞에서 마른세수한 다음 문을 열었다. 테이블에 앉자 고모가 찬찬히 말했다.
“돈 필요하지? 그래도 넌 네 아빠보다 낫다. 사흘씩이나 입을 못 열고 있으니 말이야. ……돈은 없지만, 얘기는 들어 보자.”
“돈이 없다니, 왜?”
마지막일뿐더러 유일한 언덕이 무너지는 아득함으로 수완이 되물었다. 고모는 뜨문뜨문 신상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했다. 다양하고 긴 사연이었지만 수완의 뇌리엔 한 문장으로만 정리되어 박혔다. 오빠에게 1억5천을 대출해 주었는데 이자가 치솟기도 해서 명예퇴직으로 해결했다!
“직장까지 그만두었다고? 고모, 바보야? 왜 그 인간에게 맨날 당하고만 있어?”
명료한 정신으로 수완이 말했다. 쪽방촌 사람을 대할 때처럼 차분하고 명철해졌다.
“그 인간이라니.”
“그럼 그놈이라 해, 그 새끼라 해? 난 분명히 기억해. 그 인간, 엄마 죽자마자 나도 외면했어. 내가 엄마를 죽였다고 해도, 자식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나는 엄마만 잃은 게 아니라 그때부터 고아였어. 고모가 있었기 망정이지 엄마 따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걸.”
“네 아빠도 힘들고 무서웠겠지. 내가 있고 너도 웬만큼 컸으니까……”
“엄마 보험도 떼먹으려고 했잖아. 고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놓는다고 나한테도 그러더라. 뭐가 힘들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딴 여자 만난다고? 새 가족 꾸린다고? 나는 뭐였는데, 나는 가족 아냐?”
“수완아, 진정해. 쫙 깔고 말하니 무섭다야. 네 아빤들 맘 편하진 않았겠지. 지금은 열심히 살려고 해. 물론 나도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오호, 그 정흰지 뭔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