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은 말하다 말다 입을 닫았다. 누구에게 향하는 건지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고모에게 조카는 수완 하나여야 했고 고모의 재산을 물려받는다면 당연히 수완이어야 했다. 그런데 존재로만 알고 있었던 어떤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고모도 그렇다. 언제부터 친했다고 용돈을 보내고 노트북도 사줬단 말인가. 그런데 고모는 수완의 표정과 말을 다르게 보았는지 입가에 미소부터 걸었다.
“정휘, 고등학교 가서도 줄곧 1등 한다더라. 공부도 공부지만 얘가 참 반듯해. 메시지를 하나 보내도 정성이 느껴져. 아, 사진 함 볼래? 동생이잖아.”
“됐어, 나중에.”
수완이 짧게 말하자 고모가 만지던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수완은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으로 몸을 뒤로 뺐는데, 못죽이라도 끓일 참인지, 고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부지런한 하녀 이야기 있잖아. 예전에는 부지런한 것만 봤는데 요즘엔 자기가 만든 옷 입고 즐겁게 춤추는 게 눈에 들어오더라. 어떤 순간에도 즐거움을 누리는 건강한 에너지, 아, 그게 우리 수완이구나 싶기도 했고. 나 말이야, 유치원, 어쩔 수 없이 그만둔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지금이 너무 좋거든. 이 안에 숨겨진 내 리듬이 뭔지 찾아내는 게 즐거워. 하녀처럼. 어, 한 캔 더하자.”
일어나려는 고모를 제지하고 수완이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밝은 빛과 함께 냉기가 훅 끼쳤다. 잠시 그대로 섰던 수완은 문득 할 일을 깨닫고 맥주 캔을 꺼냈다. 두 볼에 하나씩을 댄 채 거실 테이블로 돌아왔다. 수완이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고모가 말했다.
“아 참, 나도 장기기증했다. 증서도 받았어. 네 말대로 온라인으로 하니 금방 되더라. 연명치료 거부도 했으니 알아둬. 내게 무슨 일 생기면 네가 나서서 해 줘. 수고비는 미리 챙겨둘게.”
“아이, 고모. 취했어? 갑자기 왜 이래? 요즘이 인생 최고 나날이라면서 하필 그런 말을……”
수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번은 해야 할 이야기잖아. 불편해도 알아둬야지.”
“그래? 그게 다야? 뭐, 뭐 더 놀라게 할 이야기는 없어?”
고모에겐 연금이 있고 집도 있고 보험도 있다. 수완이 넘겨짚을 건 아니지만 고모의 1순위는 수완이다.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아빠라는 인간은 물론 정휘라는 녀석, 어림없다.
“내 생명보험은 유산 기부할 거야. 복지단체 유산관리팀에 의사 밝히면 그쪽에서 사업자등록증을 보험회사로 보내준대. 나는 수익자를 복지단체로 바꾸면 되고.”
예상치 못했던 말들이 이어졌다. 도대체 고모는 왜 이렇게 바뀌었나, 누가 고모를 이렇게 뒤흔들었나. 고모 말처럼 수완 자신이라면 제 발등은 찧은 셈인가. 수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수완아, 이제 진짜 하고 싶은 말, 너 힘들면 여기 들어와 살아도 돼.”
“여기? 일은?”
“지친다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도 네가 힘들면 그만둬도 돼. 세상에 나 없으면 안 되는 일은 없어. 너를 갉아먹으면서까지 꼭 매달릴 일도 없고. ……여기서 쉬면서 다른 일 모색해 봐. 이야기 속 하녀처럼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일.”
“아, 모르겠어.”
수완은 한숨 쉬듯 말을 내뱉었다. 흐르는 침묵 사이로 빗소리가 섞이고 수완의 생각도 깊어진다.
고모를 찾아 옛집으로 온 이유와 다르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으로 여겨졌다. 아니, 더 나은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긴 세월 혼자 살았기에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쪽방촌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완이 멀리 있는 동안 아빠라는 인간과 정휘라는 녀석이 수작 부리게 둘 수도 없었다. 이 집에 버티면서 이 집 명의든 생명보험 수익자든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수완은 고모를 보며 맥주 캔을 들어 보였다. 고모도 웃으면서 그대로 했다. 수완은 맥주를 마시다가 문득 자신이 쪽방촌 에 사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