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학창 시절 취미란에 흔하디 흔한 독서를 적을 수도 없을 만큼 책 읽기와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직장 생활하면서 읽는 것이 재밌어졌고 많은 책을 읽었다. 시켜서 하는 공부나 의무감에 읽는 책 읽기가 즐거움을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겠지.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 것은 소설이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소설을 읽었다. 읽는 재미에 빠져 날이 밝은 줄 모르고 밤새 읽다가 출근한 적도 많았다. 가방에는 항상 책이 들어있었고 지하철에서는 늘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었다.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소설 쓰기에 관심 많은 친구가 있었다. 습작으로 쓴 소설을 읽게 해 줬을 때 친구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소설을 쓸 수가 있지? 친구지만 대단해 보였다.
그 친구가 말했다.
"너의 감성이 아까워, 글 좀 써봐"
"내 감성이 특별해?"
"응, 특별해. 너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이 있어"
"그게 뭘까?"
친구는 만날 때마다 자기가 쓴 소설을 보여주며 읽어달라고 했고 언제 글쓰기 시작할 거냐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무슨 글쓰기냐며 웃고 말았다. 나만의 감성이 아깝다고 함께 하면 좋을 거라며 수필 쓰는 분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소설과 수필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그분의 글을 읽으며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그분이 말했다.
"단미님만의 문체가 있어요, 자기만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에요. 복 받은 겁니다."
"저만의 문체가 있나요? 그게 뭘까요?"
"간결하면서도 진솔하고 담백해서 술술 잘 읽히는 글이라고 할까요? 꾸준하게 글쓰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 후, 나는 거침없이 쓰기를 시작했다. 어느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일주일 만에 초고를 완성하고 퇴고를 거쳐 출판사에 투고할 만큼 겁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글쓰기를 하게 되었고 책 출간으로 이어졌다. 배워본 적 없어 글쓰기의 어려움을 알지 못했고 쓰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도 몰랐다. 오직 쓰는 일이 즐겁다는 생각뿐이었다.
쓰기의 달콤한 즐거움에 빠진 나는 글쓰기에도 여러 가지 맛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생각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인데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겠지. 모든 일에 좋은 면이 있으면 반대로 나쁜 면도 있기 마련이지. 쓰는 일이 즐겁기만 하겠는가? 쓰는 즐거움 뒤에 쓰디쓴 글맛도 존재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지.
겁 없이 시작해서 거침없이 써 내려가던 글쓰기가 무서워졌다. 한 번 쓰면 고쳐본 적 없던 글을 어느 순간 한 줄 쓰고 두줄 지우거나 한 줄도 못쓰고 노트북을 덮는 일이 많아졌다. 일필휘지로 쓰기 시작하면 마무리까지 써 내려가던 글쓰기는 자꾸만 주춤거리고 망설이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급기야 쓰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쓰는 일을 놓지 않고 있다.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함을 호소하면 한결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도 무조건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쓰는 사람이 겪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내 글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신 없음에 뒷걸음치고 주눅 드는 기분을 떨쳐내는 용기가 필요해 보인다.
군중 속의 고독이랄까, 많은 친구가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글쓰기가 그런 거 같다. 글쓰기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거침없이 쓰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쓴 글에 심취되어 만족스러워했다. 시간이 지나고 쓰는 사람 틈에서 글쓰기에 대해 보고 듣고 뭘 좀 깨달았는지 잘 쓴 글을 보며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 잘 쓴 글은 많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나만이 쓸 수 있다. 달콤한 딸기향 물약을 먹다가 쓰디쓴 가루약 맛을 알게 된 기분이랄까.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처럼 글쓰기의 쓴맛은 자신 없어 주눅 든 지금의 내 모습을 바꿔줄 처방받은 약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멈추지 말고 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