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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May 31. 2023

너랑 나랑 똑같이 생겼다

엄마와의 영상통화

영상통화가 끝날 무렵, 내가 뭘 눌렀는지 갑자기 엄마와 나의 얼굴이 화면에 반씩 차지하게 바뀌었다. 통화를 끊기 전, 엄마는 그런 화면을 보며 막 웃으시더니 갑자기 말씀하셨다.


"야, 이렇게 보니까 너랑 나랑 똑같이 생겼다."


맏딸답게 아빠를 꼭 빼닮은 내가 엄마를 닮는 것은 정말 스치듯 봐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얼굴 또한 내게서 조금은 나타나는 모양이다. 이마를 내놓고 진한 화장을 한 결혼식 날, 몇몇 분에게 엄마와 닮았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엄마를 닮은 거라곤 둥근 이마와 쌍꺼풀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그때는 그런 말을 듣고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휴대폰 화면을 반씩 차지한 엄마와 나의 얼굴을 나란히 보는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부쩍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부모님을 보는 감정은 예전과 같지 않아서일까? 문득, 나의 거울처럼 엄마를 바라본다.


아빠가 군대도 가기 전에 결혼을 서둘러야만 했다던 젊은 시절 엄마의 미모는 어린 나의 자랑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엄마의 미모 칭찬을 심심찮게 들었고, 내가 봐도 그때의 엄마는 정말 예뻤다. 아빠 붕어빵인 나와 달리 이목구비가 진한 엄마는 늘 내게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학교에 학부모 참여수업을 하러 온 엄마의 모습은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난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원피스를 입고 교단에 서서 전지에 준비한 수업내용을 가르치던 그날의 엄마는 잦은 전학으로 눈치만 늘었던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이렇게도 선명한 걸 보면, 그 장면은 아마 언제까지고 내 머릿속에 이렇게 각인돼 있을 것이다.


엄마는 간호사를 그만둔 이후 쭉 전업주부로 사셨다. 내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 그 삶을 제대로 그려보지 않아 몰랐지만, 요즘은 생각이 많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대부분의 기간에 급식이 없었으니 도시락도 싸주셨고, 지금의 나만큼 외식도 못했을 거고, 아빠 일도 도우셨는데, 24시간을 어떻게 쓰셨을까? 나는 맨날 애들 재우다가 그 곁에 새우, 혹은 해마처럼 몸을 구부리고 잠들곤 하는데 엄마도 나처럼 곤하셨을까? 엄마의 답은 사실 심플하다. 20대에 키우면 체력적으로 다르긴 하다고. 아무래도 우리 엄마는 MBTI 하면 분명 T가 나올 거다. 절레절레. 너무 다정하지는 않아도 헌신적인 우리 엄마.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워킹맘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아무렴 어떻게 집에서 애만 보겠냐는 생각이었는데 내가 그걸 10년째 하고 있다. 엄마는 간호사를 그만둘 때 어떤 생각이셨을까? 내가 넌지시 여쭤본 적 있지만 엄마는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셨다. 난 엄마에게 더 질문을 하려다 말았다. 엄마가 전업주부로 산 세월을 보상할만한 효를 행한 것도 딱히 없는 듯해서 질문에 자신이 없어졌다.


아이들을 재우고 오늘은 살아 나왔다. 그래봐야 시간이 늦다. 일단 씻었다. 내 비록 아파트 생활이 오래간만이지만, 공동주택인 만큼 물 쓰는 일은 좀 빨리 마치고 싶어 서둘렀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저녁에 아이 학원 기다리느라 들렀던 카페에서 남겨온 커피를 홀짝였다. 남편이 쥐여준 초콜릿도 야금야금 먹는다. 이 맛이야. 그런데 고개를 들다 산더미처럼 거실에 쌓인 빨래가 보여서 순간 초콜릿 한 조각을 알약처럼 꿀꺽하고 말았다. 목구멍을 훑는 불편감에 이어 억울함이 찾아든다. 아, 몸에 들어가 버린 고칼로리인데 맛을 못 보고 이렇게 삼키다니 아깝다.


새벽에 깨어 열일하다 보면 현타가 씨게 온다. 누가 월급도 안 주는데 이렇게 열심인 삶이라니. 엄마의 전철을 밟고 있는 걸까? 나는 엄마를 닮았는가? 희생적이고 불평 없고 부지런했던 엄마의 삶보다 좀 불량한 버전이지만 내 삶이 점점 삭제되어 가는 면에선 엇비슷하게 가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된다. 이왕이면 그런 거 말고 얼굴 쪽을 많이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 나는 엄마와 달리 심각한 감정형 인간이라 내 감정적 욕구가 해소되지 않는 지금의 일상을 견디지만 견딜 수 없는 것도 같다.


이 정도로 자녀 중심적 삶이라니. 나도 전업맘이 된 지금, 엄마라는 이름에 대해 다소 울퉁불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휴대폰에 저장된 엄마의 이름을 엄마가 아닌 진짜 성함으로 바꿔드릴까 생각했다가 멈췄다. 그리고 굳이 고치지 않았다. 그냥 엄마라는 글자 옆에 하트를 하나 붙인다. 나는 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고 엄마는 내게 엄마구나 생각했다. 나는 엄마를 누구누구 씨가 아니라 엄마로 사랑하는 딸일 뿐인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랑을 받은 것도 나고,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인데 엄마라는 이름이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어느덧 나의 이름 중에도 엄마라는 이름이 추가되었고, 난 나의 아이들이 아주 나중에도 엄마라고 하는 걸 듣고 싶을 것 같아서 말이다.


엄마라는 이름이 바꿔놓은 나의 모습들은 언젠가의 내가 막연히 그리던 삶을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뭐, 이토록 집안일이 끝이 없는 것이야말로 놀라울 따름이지만. 아무래도 설거지가 곧 싱크대를 넘쳐흐를 것 같은 상상을 하며 아이들에게 읽어줬던 동화를 떠올린다. 그 책에서는 물이 넘치자 그 물을 파도 삼아 타고 쭉쭉 신나게 내려가던데. 문득 깔깔대는 녀석들의 웃음이 들리는 것만 같다. 삶은 평온하지도 보드랍지만도 않지만, 어디론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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