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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꼭 맞는 두통약처럼

내게 꼭 맞는 자식들

by 미미

우리 집 큰 녀석 동동이는 먹는 것에 진심이다. 이유식 먹던 아가 시절부터 식재료 가려내는 능력이 굉장했다. 말을 배우자 들어간 재료를 맞추기 시작했다. 뭐가 더 들어가면 좋겠다는 둥, 이번엔 뭐가 들어갔냐는 둥. 어찌나 잘 맞추는지 내가 장금이를 낳았나 생각했는데 그 후로도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 동동이는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장소를 기억할 때는 거기서 먹은 걸 외우는 방법을 쓰는 것 같다. 우리 가족은 그것을 기먹력이라고 부른다. 자기 입맛에 맞는 건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있다가 불현듯 떠오를 때 먹고 싶다고 외친다. 그러면서 난 별론데 싶은 것도 다시 먹게 되곤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입맛은 뒷전이 됐다. 내 요리에는 청양고추도 고수도 넣을 수 없고, 야채나 해산물을 내 맘대로 듬뿍 집어넣을 수 없다. 매번 나 먹을 걸 따로 할 여력은 없으니 아이들 입맛으로 단일화한다. 외식을 해도 아이들이 기준일 수밖에 없다. 애들이 먹을 수 있나, 너무 맵지는 않나. 오늘 두통약을 삼키다가 이 약만 내 맞춤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통도 잦고 어지러움증과 과호흡도 겪어본지라 아침에 눈을 뜰 때 그날의 컨디션에 예민하다. 적어도 두통은 빈속에 뭔가 먹는 걸 성공하기만 하면 가장 쉽게 수습이 가능하다. 내게 잘 듣는 두통약이 늘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 두통약을 먹을 때는 달력에 표시를 한다. 설명서에 약을 먹는 횟수가 한 달 기준 10회를 넘기면 병원에 가라고 적혀있다. 과용하면 안 된다는 부담이 있다 보니 3월의 절반을 보내는 지금 7회가 채워진 달력을 보며 깜짝 놀란 참이다. 아, 안 먹을 수도 없고. 예전엔 뒷목에 주사도 맞아봤는데 효과는 잘 모르겠다. 약효가 돌고 두통이 가시자 뭐든 할 수 있을 것은 개운함이 찾아온다.


시도 때도 없는 두통의 발현이 얼마나 괴로운지 겪는 사람은 안다. 정상적 생활이 어려울 지경이다. 생리기간에야 말할 것도 없다. 산부인과에서 상담을 하다가 생리통에는 생리를 앞둔 즈음부터 미리 진통제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고도 들었는데, 내 현재 상황에서 그렇게 미리 먹다가는 두통약을 비타민처럼 너무 많이 먹게 될 듯해서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영양제는 맨날 귀찮아서 안 먹는데 두통약이 이길지도 모른다. 두통이 사라지는 순간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본래의 나는 약을 기피하는 편이었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몸에 부담이 갈 터인데 과도한 섭취는 지양해야 한다는 자세가 내게 학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참는 것에 능한 내 성향 또한 한몫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런 생각이 바뀐 데엔 육아가 있다. 두통이 정말 심한 날은 속이 메스껍기 시작하고 토할 것 같은 상태와 어지러움이 동반되기 때문에 일상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쉴 수 있는 여건이라면 그냥 쉬어라도 보겠으나 내가 모시는 상사들은 병가를 허하거나 업무량을 줄여주지 않는다.


"미국 살 때 엄마가 못 일어나게 아팠는데 너네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어요?"

"우리 밥은 누가 주냐고."

"아, 우리가 너무하긴 했네."


미국에서 그리 바빴던 남편이 나 때문에 휴가를 썼던 게 딱 한 번 있다. 그게 바로 내가 Strep Throat (패혈성 인두염)에 걸려 뻗었던 며칠이다. 고열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내게 들린 -당시 영유아였던- 아이들의 자기 밥 걱정이었다. 그렇게 귀엽고 혀 짧은 말투로 밥 찾기 있냐. 이제 와서 얘기하니 동동이와 복복이는 아픈 엄마를 두고 그런 말은 본인들이 너무했다며 뻘쭘해한다.


"엄마, 그래서 딸이 있어야 하는 건가요?"

"응? 엄만 그런 말 안 했는데?"

"딸은 안 그러지 않을까요?"

"하하. 글쎄, 엄마는 딸이 없어서 모르겠네?"

"아!"

"흠, 엄마는 외할머니한테 그랬을 것 같지 않긴 해. 딸도 딸 나름이겠지."

"......"

"엄마는 아들 둘도 괜찮아."

"근데 딸이 더 키우기 쉬워 보여요."

"그걸 어떻게 알아?"


마트에서 지나가던 할머니, 미용실 아주머니, 심지어 붕어빵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하도 주변에서 딸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통에 우리 애들도 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귀에 박힌 모양이다. 둘 다 아들이라 그런 거라고 원망할 셈은 아니었는데 결론이 이상하게 난다. 괜찮다고 덧붙여놓고 보니 변명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하다. 뭘 봤길래 애들 눈에 딸이 키우기 쉬워 보일까 했는데 학교에서만 봐도 여자애들이 더 말을 잘 듣는다고 한다. 웃기기도 하고 진짜 누구 말대로 딸 없어서 나중에 적적하려나 싶기도 하다.


"우리 때문에 아프신가? 말 안 들어서?"


복복이의 뜬금없는 자기 객관화에 당황했다. 아니, 너희가 어마어마하게 말을 잘 듣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야. 혼이 나도 금방 엄마를 부르며 찾는 단순한 아들들이야말로 내게 꼭 맞는 자식 유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예민한 편인데 딸이 있었다면 더욱 서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꼭 맞는 약을 찾아서 두통을 달랠 걱정은 덜었지만 자꾸 치고 들어오는 걱정과 불안들을 지나치게 안고 묵상하며 사는 것 같아 일단 스스로를 돌보려고 한다. 꼭 맞는 두통약처럼 내게 꼭 맞는 일상의 온도를 느꼈으면 좋겠다. 결국 그 온도를 찾는 것이 내 몫이겠지 싶어 애써보련다. 다 그럴만하니까 주어지는 몫이고 결국 내 삶의 요소들은 서로 온도를 맞춰가며 어우러지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덧붙이자면...


"아들들아, 너희는 제법 엄마랑 어울리는 자식들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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