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사랑하리 :

자카르타의 아미고(Amigo)

by lea

자카르타의 오후는 따뜻한 물속을 유영하는 기분이다.

(2023년 4월. 한국 대사관에서 그리기 강습 후 현지 학생들과)



공기 중에는 습기와 매연, 그리고 이름 모를 향신료의 냄새가

섞여 나른하게 감돈다.

이 도시의 시계바늘은 한국의 그것보다 분명 세 배쯤 느리게 움직인다.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해도,

관공서에서 서류 한 장을 처리해도,

그들은 "쁠란-쁠란(Pelan-pelan, 천천히)" 이라는 그들만의

견고한 리듬을 결코 깨뜨리는 법이 없다.


한국인인 나는 생각한다.
​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쩌면 '속도'라는 형벌을 기꺼이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최단 거리를 계산하고,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수를 읽어내며,

꽉 막힌 도로 위에서도 효율적인 우회로를 찾아내는

진취적인 유전자를 가졌다. '

그런 우리에게 인니인들의 느릿함은 때로 극심한 갈증처럼 목을 죄어온다.


***
​한 번은 마트 계산대에서 내 앞의 손님이 점원과 한참이나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뒤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음에도 절대 앞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들은 어제 본 드라마나 오늘 저녁 메뉴 같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거렸다. 이런 일은 너무나도 흔한 풍경 이고 일상이다.

한국 같았으면 벌써 누군가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왔을 상황이었을.

"대체 왜?"라는 의문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정교한 시계를 억지로 멈춰 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답답함의 끝에서 나를 되돌려 세우는 것은

언제나 그들의 미안함 섞인 미소였다.
​무언가 일이 꼬이거나 한참을 기다리게 만들었을 때,

그들은 특유의 순한 눈망울로 "Maaf(미안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 사과에는 악의도, 비굴함도 없다.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정작 서두르는 법 없이 다시

제 속도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도로 위에서 아찔하게 끼어들기를 한 오토바이 운전자가

헬멧 너머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일 때,

그 무해할 정도로 순수한 웃음 앞에 나의 날 선 분노는

맥없이 꺾이고 만다.

인생을 마치 긴 산책(Jalan-jalan)하듯 유랑하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팽팽하게 당겨졌던 나의 신경줄은 어느덧 힘없이 풀려버린다.


​물론 이곳에도 세상 어디나 그렇듯 영악하게 제 실속만

차리는 이들이 존재한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교묘한 핑계를 대거나,

약속을 어기고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삶의 피할 수 없는 한 조각임을,

마치 잘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듯

나는 그들의 존재를 담담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이들을 언젠가부터 종종 '아미고(Amig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스페인어로 친구라는 뜻이지만,

내게는 '이해할 수 없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타인'이라는

의미로 적용 시켰다.

그들의 느린 걸음은 내가 놓치고 지나온 풍경을 되돌아보게 하고,

무모할 정도로 낙천적인 이들은

내 안의 뾰족한 진취성을 부드럽게 마모시킨다.

똑똑한 두뇌와 빠른 판단력이 세상을 바꿀 수는 있겠지만,

텅 빈 마음을 채우는 건 결국 곁에 있는 아미고가 건네는

서툰 사과와 순수한 웃음소리라는 것을 자카르타의 노을 아래서 배운다.


​“모두 다 사랑하리 ”


​오늘 저녁에는 문득 송골매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사실 이 노래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좋아하던 곡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전주만 들어도

마음이 일렁이던 그 시절의 선율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낯선 타국 땅 자카르타에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때는 그저 멜로디가 좋아 흥얼거렸던 그 가사는,

이제

낯설지만 묘하게 친근해져버린 이 풍경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내 삶에 큰 힘이 되어준다.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영악하면 영악한 대로,

순수하면 순수한 대로. 나는 내 곁의 아미고들을,

그리고 이 습하고 느릿한 생의 한복판을 기꺼이 사랑하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숨을 쉬며 나의 삶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터득했음이라.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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