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서 피어난 색채의 기록 ​

어둠 속의 진단과 희망의 불꽃

by lea

​미국에서 돌아온 자카르타의 나날은 아직 팬데믹의 잔영이 가시지 않은 시기였지만,

제 내면에는 강렬한 색채의 충동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향한 욕구는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눈을 감을 때마다 망막을 가득 채우는 생생한 이미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 환영은 늘 비슷했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깊은 코발트블루의 하늘 아래, 무성한 들판에는 야생화들이 밀집해 있고, 그중에서도 하얀 꽃잎 사이로 작은 노란 꽃술을 엮어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민들레의 모습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저는 거의 매일매일, 이틀에 한 작품꼴로 캔버스를 채워나갔습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는 것을 보자마자, 저는 바로 이젤 앞에 앉았습니다.

꼬박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물감을 덧칠하고, 때로는 붓 대신 맨손으로 물감을 문질러 원하는 색과 질감을 빚어냈습니다.

제 색깔들을 캔버스 위에 입혀나가는 3년의 시간은 순수한 행복의 기간이었습니다. 작품이 쌓일수록 뿌듯했고, 그 그림들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제 작은 전시회를 열게 된 계기는 이러한 행복의 궤적을 벗어난,

전혀 예상치 못한 전환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우선, 공간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카르타로 돌아와 처음 자리 잡았던 폰독인다 지역의 아파트는 비록 넓지는 않았지만, 햇볕이 풍요로웠습니다.

아파트 단지 자체의 분위기도 활기찼고, 부대시설이 훌륭했습니다.

창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길게 뻗은 수영장, 아치 모양으로 뒤덮인 꽃과 나무 사이를 거닐다

만나는 실내외 짐 클럽 등이 좋았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일 년 내내 여름이기에 몰(Mall) 문화가 발달한 것이 특징 중 하나입니다.

보통 몰에 가기 위해서는 차량을 이용하거나 뜨거운 열기를 그대로 받으며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의 몰은 자카르타인들에게는 외부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한 필수 건물이었고,

우리 집은 지하 주차장과 하나로 이어져 지상(몰)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위치상 더없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시원한 통로를 통해 오아시스로 가는 즐거운 기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안식처 같은 집에서 저는 매일매일 다양한 영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나의 모습',

때로는 수직 혹은 수평 구도의 '자작나무' 연작,

그리고 미국 애틀랜타 캠핑장에서 느꼈던 '수풀이 우거진 산'의 웅장함까지.

3년간의 창작과 더불어 그림 수업을 진행하고 작품을 팔거나 의뢰받아 그리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값진 나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집의 임대료가 지나치게 높다는 현실적 인식이 찾아왔고, 저는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자카르타의 집값은 서울과 비견될 만큼 높았습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물색한 끝에, 1월, 간다리아 시티 몰 근처의 원파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이사 후, 미묘하지만 심각한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이전 집은 저에게 '아틀리에'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을 만큼 창작 공간이 완벽하게 형성되어 있었지만, 새집에서는 그 공간이 기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전혀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볕은 충분히 환하지 않았고, 그때부터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는 극심한 무력감과 피로가 저를 덮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젤은 식탁 옆 작은 자리로 밀려났고, 저는 더 이상 이전처럼 그림을 그려낼 수 없었습니다.

몸이 무거워지고 마음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제 마음은 마치 작은 깡통에 빗물이 뚝뚝 떨어져 채워지는 것처럼, 슬픔과 눈물로 가득 찼습니다.

한두 달 만에 저의 행복은 사라졌고, 결국 작은 방 침대에 몸이 묶인 채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과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에어컨을 최대한 낮춰 시베리아 벌판처럼 차갑게 만들고 거위털 이불속에 갇혀 지냈습니다. 살면서 번아웃을 심각하게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자카르타로 다시 돌아온

첫 해에 맹장 수술과 (얕은 뇌전증 현상) 기절 경험 등으로 인해

체력이 바닥난 이런게 번아웃인건가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오판이었습니다.
​제 상태를 걱정한 남편은 자카르타의 좋다는 병원들을 찾아 저와 동행했습니다.


여러 날 진료를 받고도 명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던 중, 마침내 저는

갑상선기능저하증이라는 병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분이 운영하시는 병원에서 진행한 검사 결과, 갑상선 문제와 갱년기 증세가 겹치면서 우울증이 동반된 상태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가 겪고 있던 고통의 실체가 밝혀진 순간이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2026년 1월 한국방문시 정밀 검사의 결과는 갑상선 만이 아니었고

여러가지가 결과가 나온 현재입니다.

그렇게 다 알고나니 지금은 오히려 시원?했습니다)


***


그러던,
​그 해 6월, 한국에서 친한 언니의 따님이 자카르타를 방문했습니다.

적막했던 공간에 생기가 돌아오자 저도 작은 힘을 얻었습니다. 아이와 열흘 동안 여러 카페와 음식점을 다니며 잠시나마 즐거움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열흘 중 어느 밤, 저는 갑자기 그림 한 점을 밤샘 작업으로 완성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채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가 "이모 그림이 집을 밝혀준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순수한 한 마디가 저에게는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불꽃을 되살려주었습니다.

자녀가 없던 저는 외로웠던 시간 속에서 친딸과 함께 지내는 듯한 기쁨이었습니다.

*
​아이가 돌아간 후, 저는 그 아이와 함께 둘러보았던 카페 중 한 곳을 섭외하여 7월에 전시를 '강행'했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에 관계없이, 마치 자식 자랑을 하듯 제 그림들을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와 바람을 쐬게 하고 싶었습니다. 열흘간의 전시는 제게 성공적이었습니다.

매일 꽃을 들고 찾아와 작품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 심지어 인도네시아의 유명 배우들까지 찾아왔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참 신기하고 기특하게 느껴졌습니다.

***


치유와 안식의 시간.
​그 후의 이야기입니다. 전시의 기쁨은 잠시였고,

저는 1년이 훨씬 지난 12월인 지금(2024년 작성 시점)까지도

우울증과 힘겹게 싸우고 있습니다.

아직 붓은 손에 쥐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하늘의 엄청난 위성 수보다 많고, 우주의 알 수 없는 넓이와 크기보다 깊은

작품에 대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비록 제 마음이 고장 나 있고 몸이 무력할지라도,

저의 깊고 깊은 그림의 사랑이 언젠가는 반드시 저를 다시

이젤 앞으로 이끌어 줄 것임을 알기에 감사합니다.

이토록 소중한 '달란트'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지금은 이 힘든 여정을 통과하며 저의 재능이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치유와 안식의 시간입니다.

제 그림은 잠시 멈추었을 뿐,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