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귀가 있음에 감사했던 시간
(2010년 10월에 쓴 글입니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본 그 카페는 제주도 애월의 해안도로변, 눈여겨 보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외딴 곳에 있었다. 작은 알파벳 간판만 덩그러니 박혀있는 별 장식없는 건물. 그 내부는 높다랗게 트인 천장 덕에 쾌적했고, 회색 벽면엔 빈티지한 액자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입구쪽의 대형 스피커와 카운터 겸 바(bar) 쪽의 넓찍한 벽장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백개의 LP판들이 바로 이 카페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최상의 사운드로 LP음악을 즐길 수 있는 이 곳은 제주의 숨은 명소인 음악카페 마틸다(MATILDA)이다.
오래된 남자친구 H와 제주도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마지막날 밤의 데이트 코스로 그는 이 곳을 추천했다. 영업시간이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라서 한밤에 붐비는 특이한 카페가 있는데 예전에 지인들과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며.
"너가 좋아할 만한 분위기라서 꼭 데려오고 싶었어."
자신있게 말하는 그를 따라서 마틸다의 육중한 철문을 밀고 들어섰다. 귀를 파고드는 웅장한 사운드와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는 샹들리에가 우리를 맞이했다. 왠지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공기마저 특별한 성분을 머금고 부유하는 듯 했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의 카페를 좋아하는 나는 조도가 낮은 조명 덕에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메뉴판을 보고 보통수준을 웃도는 가격대에 잠깐 심기가 불편해졌다. 비싸다며 툴툴거리는 내게 H는, 여기는 음료 마시러 오는데가 아니라 음악 들으러 오는 데라서 다른 곳보다 좀 비싸니까 가격 상관말고 주문하라며, 달래듯이 말해주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알콜이 좀 들어가줘야 몸 속의 바이오리듬이 음악 감상에 최적화 된 모드로 바뀔 것 같아서 나는 데낄라 썬라이즈를, H는 피냐콜라다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앳되지만 노련해보이는 종업원은 쪽지와 펜을 건네주며 신청곡을 적으라고 했다. 이런 곳은 실로 오랫만이라 신선한 기분으로 나는 열심히 신청할 곡들을 생각했다. 반면 H는 아는 음악이 별로 없다며 선곡을 포기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음악을 좋아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로 나눈다면 난 생각할 것도 없이 전자에 속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편이다. 선호하는 장르는 뉴에이지와 클래식, 크로스오버. 좋아하는 분위기는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 팬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음악가는 바흐와 쇼팽,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던 락밴드 넬(NELL). (아... 넬의 콘서트장에서 얼마나 많은 해드뱅잉을 했었던가, 무아지경에 빠져 사운드의 파도 속에 흐느적거리던 내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취향이 뚜렷한 만큼 호불호도 강하지만 분명한 건 음악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으며 '음악은 국가가 허락한 유알한 마약'이라는 우스갯소리에 격한 동의를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늘 이어폰을 지니고 다니며 일상의 BGM들을 재생한다.
내가 신청한 곡들은 예전에 즐겨 듣다가 어느샌가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사라져버린, 하지만 그날 마틸다의 어둑한 조명 아래서 불현듯 생각났던 것들이었다. 이니그마의 Return to Innocence, 사라 브라이트만의 Winter in July, 코스티아의 Girl from Barcelona, 총 세 곡을 야심차게 쪽지에 적어서 턴테이블 근처에 있는 분께 가져다드렸다. 사장님인 듯 보이는 초로의 남자분은 말없이 시크하게 쪽지를 힐긋 보시더니 수많은 LP판의 숲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제주도 햇살에 그을렸으리라 짐작되는 구릿빛 팔뚝으로 LP판들을 뒤적이는 사장님의 뒷모습에서 장인 특유의 포스가 느껴졌다. 이 방대한 LP들을 전부 수집하고 꿰고 있을 정도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음악적 지식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할까. 경외심에 고개가 숙여졌다.
자리로 돌아오니 주문한 칵테일들이 나왔다. 상큼한 시트러스향이 나른했던 정신을 잠시 맑게 해주었다. 각자의 잔을 홀짝거리면서 H와 나는 3박 4일간의 짧은 제주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몰아서 감상하기도 하고, 그 사진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각자가 기억하는 만큼 경쟁적으로 재잘대다 보니 아늑하고 편안한 만족감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거기에 데낄라 썬라이즈가 전해주는 취기도 한몫을 해서 마치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신청한 첫 번째 곡, 이니그마의 Return to Innocence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이어폰과 최고급 스피커의 음질 차이는 실로 하늘과 땅이었다. 빵빵한 사운드에 감격하며 듣다보니 절로 이십여년 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중학생이던 어느 해 겨울밤, 왠지 잠이 오지 않던 나는 다른 가족들이 깰까봐 이어폰을 워크맨에 꽂고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듣게 된 Return to Innocence. 특이하게 남국의 원주민이라 추정되는 남자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성진 노랫소리로 시작해서 강한 비트와 몽환적인 멜로디가 어우러지며 절정을 맞이하는 이 노래는 열 네 살 소녀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세상에 이런 노래도 있을 수 있구나. 게다가 순수함으로 돌아가자는 뜻의 제목도 얼마나 신비스럽던지. 중2병 예비환자였던 나의 감성에 불을 지핀 이 노래는 매일 밤 나의 자장가가 되어주었었다.
두 번째 곡 사라 브라이트만의 Winter in July도 연이어 나오자 행복감은 더욱 커졌다. 마치 내가 작곡한 음악들을 선보이는 양 괜시리 뿌듯해지기까지 했다. 어느새 자기 잔을 다 비워버린 H는 두번째 칵테일을 주문했다. 다행히 그도 내 신청곡들에 매료된 듯 했다. 최근 몇년간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신청곡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 동안 그는 눈을 빛내며 들어주었다.
"사라 브라이트만은 뮤지컬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전부인이었어. 오페라의 유령 여주로 유명하고. 그런데 나는 이 여자에 대한 어떤 배경지식도 없던 상태에서 라디오로 이 여자 음악을 처음 듣고 완전 빠져버렸지, 이니그마처럼. 진짜 라디오가 열일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때 반했던 노래는 사라 브라이트만의 다른 노래인 Eden이었다. 몽환적인 에로틱함이 철철 넘쳤던, 하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고 고급스러웠던 그녀의 음악은 완전히 내 취향에 들어맞았다. 지금도 여전히 즐겨듣고 있지만, 내가 월정액을 내며 이용하는 음원사이트에서는 서비스가 되지 않는 그녀의 곡 중 하나가 내가 신청한 Winter in July였다. 역시나 귓전을 울리는 강렬한 비트와 사라 브라이트만의 고혹적인 목소리. 한 세기에 나올까말까 한 독보적인 음색이라고 어느 평론가가 극찬했던 글이 떠올랐다.
마지막 세번째 곡은 어떤 음원 사이트에서도 찾을 수 없어서 애태웠던 코스티아의 Girl from Barcelona. 그마저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사장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이 잔잔한 뉴에이지 피아노곡은 그 옛날 첫 귀에 꿈결같은 선율로 나를 사로잡았다. 학창 시절, 우리집 거실의 CD장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이지 리스닝 100곡 모음집. 부모님이 무슨 가전제품을 구매하시고 사은품으로 받은 물건이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그 CD를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느날 무심코 플레이 시켰다. 그리고 그 안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던 이 곡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음악 같지 않은 아름다운 선율이 거실을 부드럽게 거닐자 난 그녀와, 바르셀로나에서 온 소녀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녀를 알게 된지 불과 몇달 후 우리가족은 이사를 가게 됐고 그 혼란한 가운데 이지 리스닝 CD는 실종됐다. 잘 챙기지 못한 나 자신을 뒤늦게 질책했지만 헛일이었다. 그렇게 기억속에 아련히 묻혀있던 음악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제주도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립고 그리웠던 사람과 재회한 것처럼 난 Girl from Barcelona를 꼭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으로 형상화 된 맑은 눈망울의 어여쁜 그녀, 바르셀로나에서 온 소녀를. 곡을 듣는 내내 한 음절 한 음절이 그렇게도 애틋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처음엔 과소비처럼 느껴졌던 칵테일이 전혀 비싸지 않다고, 마치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이번에 제주도에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정신은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있지, 나는 이제까지 시력과 청력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청력을 골랐었거든? 근데 지금은 망설여진다.
볼 수 있는 능력만큼이나 들을 수 있는 능력도 소중해.
두 귀가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해진다.
여기 데려와줘서 고마워."
고해성사를 하듯 진지하게 말하는 내 손을 H는 가만히 꼭 잡으며, 내가 좋아하니 자기도 엄청 좋다고 웃음지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도가 따스했다. 갑자기 그가 왕자님처럼 근사해 보였다. 아름다운 BGM이 주는 마법이었으리라.
음악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카페 내부의 좌석들은 만석이 되어 있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인 저녁 8시에 입장해서 좋은 자리를 잡았던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부분이 우리같은 젊은 커플이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퇴근해서 한 잔의 여유와 음악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러 온 현지 직장인들도 있었다. 뒤늦게 와서 자리가 없어 실망해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짠한 마음과 함께, 먼저 자리잡은 자가 누리는 여유로운 승리감이 동시에 들었다. 이런 외진 곳에 있는 카페가 주말도 아닌 평일에 이토록 북적이다니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곳이라면, 마틸다라면 그럴 법 하다고.
내 신청곡들 메들리가 끝나고 다른 곡들이 이어졌다. 자기가 신청한 곡이 나오면 그 당사자는 눈에 띄게 기뻐하며 함께 온 일행을 툭툭 쳤다. 그리고 세상을 다 얻은 표정으로 음악을 들었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공감을 얻고픈 마음. 모든 곡들이 여기 앉아있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곡이라 생각하니 내 취향에 상관없이 하나하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모두가 알만한 유명한 곡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나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같은 곡들이 나오면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작은 목소리로 합창을 한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함마저 든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 했다.
밤 11시가 다 되어 마틸다를 나선 우리는 짙은 여운을 뒤로 하고 칠흑같은 밤의 해변을 잠시 거닐었다. 애월의 파도와 바람이 엮어내는 소리,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졌던 그 쏴아쏴아 하는 소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BGM처럼 주변을 맴돌았다.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우리는 조용히 그 마지막 음악에 귀기울였다.